[김은주의 시선] 영화 '아리랑'과 나운규 80주기

입력 2017-08-03 07:31
[김은주의 시선] 영화 '아리랑'과 나운규 80주기

(서울=연합뉴스) "이 영화는 첫째 역할이 적재적소를 얻은 것이 성공의 큰 원인을 지었으니 감독자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나운규 신홍련 주인규 남궁운 이규설 군 등은 다 각기 독특한 별다른 동작과 개성이 표현되었다. 장면은 거의 다 선명하였으며 특히 사막의 장면은 전 조선 영화를 통하여 가장 우수한 장면이라 하겠다. 신홍련 양의 연출은 처녀 출연으로는 놀랄만한 성공이라 하겠으며 그의 용모이나 기예는 확실이 조선 여우로서는 누구보다도 영화배우적 소질을 가장 풍부히 가진 사람이라 하겠다. 나운규 군의 표정은 동양사람으로는 거의 볼 수 없을 만치 선이 굵고 강정하여서 미국 배우 '따스징화 남'과 같은 굳세인 인상을 주는 것은 아직은 조선 영화배우 중의 제일인자라 하여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끝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여 성공한 여러분과 더욱히 장래의 기대가 적지 않은 신홍련양의 자중을 바란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흑백 무성영화 '아리랑'이 개봉됐다. 우리 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윗글은 10월 7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아리랑'의 평이다.

'아리랑'은 오는 9일로 80주기를 맞는 나운규가 각본, 감독, 주연의 1인 3역을 맡아 만들어냈다. 초창기 영화 대부분이 신파극, 통속 사극, 외국영화의 번안모방물 등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있던 상황에서 '아리랑'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했으며 당시로써는 뛰어난 예술성을 지녔다. 실성한 영화의 주인공은 나라를 빼앗겨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개봉 당일 영화가 끝나자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됐고 관객들이 일제히 주제곡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관객들은 목을 놓아 울었고 심지어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돌풍을 일으켜 이후 2년여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서 관객을 끌어모았다. 당시 관객이 15만 명 선이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몰려들어 극장의 들보가 부러져 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홋카이도 광산에서도 상영됐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3.1운동 당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 나가 고향에 내려온 소작인의 아들 김영진에게 옛 친구 윤현구가 찾아오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일본 경찰의 앞잡이인 오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 하자 현구가 뛰어들어 격투를 벌인다. 이를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사막을 가고 있는 환상에 빠지고 자신도 모르게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을 받아 맑은 정신을 되찾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마을 사람들의 오열 속에 포승에 묶여 고개를 넘어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김영진 역은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 역은 신일선, 윤현구 역은 남궁운, 오기호 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나운규가 발탁한 당시 16세의 신일선은 이 영화에서는 신홍련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구한말 무관 출신으로, 낙향하여 약종상을 운영했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북간도 명동중학에 입학했다. 3.1운동 당시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아 연해주로 도주했다. 시베리아를 떠돌던 중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들어갔으나 탈영하여 간도로 돌아왔다.

그는 1920년 북간도의 독립군 단체 대한국민회에 가입했다. 청진의 일제 나남 사단본부와 회령 수비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려 했던 청회선터널폭파미수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청진교도소에 1년 6개월간 수감됐다. 1923년 출감 후 회령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 연극배우가 됐고, 그곳에서 만난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에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에 연구생으로 입사해 1925년 '운영전'의 단역배우로 영화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농중조'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아리랑'을 제작했다.

'아리랑'이 성공한 후 나운규는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여 1928년 '옥녀,'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 등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 '벙어리 삼룡'을 제작했다. 독립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사랑을 찾아서'는 원래 제목이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검열에서 제목을 바꾸었다. 그러나 나운규프로덕션의 경영은 실패했다. 나운규의 무질서한 사생활과 무절제한 행동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나운규는 우리 영화계에서 꺼리던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해 지탄을 받기도 했고, 악극단의 순회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나운규는 1932년 '개화당이문'을 제작했으나 검열로 주요 장면들이 잘려나가면서 흥행하지 못했다. 대신 같은 해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해 혼신의 연기를 펼쳐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나운규는 1936년 '아리랑 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했다. 그러나 동시녹음 촬영은 순조롭지 않았고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하여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오랜 생활고와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하여 그해 8월 9일 35세로 요절했다.



영화 '아리랑' 보다 유명한 것이 영화의 주제가 '아리랑'이다. 영화에는 모두 여섯 곳에서 주제가 '아리랑'이 나온다. 마지막 여섯째가 관객 모두가 울며 따라 불렀다는 장면으로, 주인공이 순사에 이끌려 고개를 넘으며 부른다.

후렴은 알려진 대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이고, 1절 가사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네," 2절 "청천 하날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3절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와요," 4절 "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만 가네," 5절 "문전에 옥답을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 말인가," 6절 "싸호다 싸호다 아니 되면/ 이 세상에다 불을 지르자"이다. 이 중 5절이 문제가 됐다.

일제는 가사가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선전물을 압수하고 출판물에서 5절을 삭제했다. 개봉 당일 전단의 압수로 극장에서 변사가 '아리랑'을 부르지 못했고, 조선가요선집에 실린 것은 대본 제출 단계에서 아예 5절을 지웠다.



나운규는 15년간 영화계에서 활동하며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다.

그는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선각자였다. 그의 영화에는 당시 피폐했던 조선인들의 삶과 독립에 대한 열망, 저항정신이 표현돼있다.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친일 자본가,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 약자들에 대한 동정을 스크린에 담았다. 그의 영화를 보며 조선인들은 울고 웃었다. 일제강점기 어두운 시절 나운규가 만든 영화들은 하나같이 검열로 난도질당했다. 그는 항일영화를 제작해 민족혼을 고취한 공로로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의 영화 인생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1919년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2019년이면 한국영화는 100년을 맞는다. 뛰어난 재능과 민족정신으로 '신화'가 된 영화인, 한국영화의 역사 속에서 나운규가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고 하겠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