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⑮ "회상열차를 서약열차로"

입력 2017-08-02 10:33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⑮ "회상열차를 서약열차로"

바슈토베서 희생자 진혼제…"고려인은 한-카자흐 협력 가교"

비극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도·다짐…80년 전 피해자 증언도

(우슈토베<카자흐스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현지 시간으로 1일 새벽 1시 33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역에 열차가 멈춰 서자 80년 전 고려인 강제이주의 길을 따라가는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 탐사단원 84명이 플랫폼에 내렸다.

우슈토베역은 소련 연해주에서부터 시베리아횡단열차와 카자흐스탄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온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첫발을 디딘 곳이다.

회상열차 탐사단원들도 지난 24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고려인 수난의 흔적을 더듬어보며 9일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6천500㎞의 열차 대장정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깊은 밤인데도 우슈토베가 속한 카라탈군청과 카라탈군고려인협회 관계자들이 나와 탐방단을 반갑게 맞았다. 행진곡풍의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카자흐스탄 여러 민족의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환영단과 깃발을 든 기수들이 환영 인사를 건넸다. '오서('어서'의 잘못) 오십시오'라고 잘못 적힌 피켓마저 정겹게 느껴졌다. 베이셈바예브 카이라트 아슈랄리예비치 카라탈군수는 직접 영접을 나와 환영사에 나섰다.

긴 열차 여행에 지친 순례객들은 뜻밖의 열렬한 환영에 깜짝 놀랐고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사라졌다. 이창주 집행위원장(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좌교수)는 "군수께서 이 시간에 잠도 못 자고 직접 마중을 나오실 줄은 몰랐다"며 고마워했다. 이부영·함세웅 공동대회장도 깊은 감사를 표시하며 관계자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인근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탐방단은 이날 오전 라힘자나 코사카르예바 학교를 방문했다. 1938년 고려인들의 손으로 문을 연 이곳은 오랫동안 고려인학교로 운영되다가 최근 들어 일반 학교로 전환했다. 초중고를 통합한 11년 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탐사단이 도착하자 방학 중인데도 여학생들이 나와 한복을 차려입고 가수 이선희의 노래에 맞춰 부채춤을 선보였다.

2층의 한 교실에는 역대 교장, 이 학교 출신 유명 인사와 한국어 교사 등의 사진이 붙어 있다. 얼마 전까지 교장은 모두 고려인이었고, 카자흐스탄 출신 유명 소설가 아나톨리 김도 이 학교를 다녔다. 1992년 6월부터 2년 반가량 한국어를 가르친 김병학 회상열차 단원의 사진도 눈에 띄었다.

카자흐한국문화센터 소장을 지내고 알마티의 고려일보 기자로도 일하는 등 카자흐스탄에서 25년간 생활한 고려인 연구가 김병학 씨는 "수교 직후 이곳에 왔을 때 '역사적 조국의 막내아들이 왔다'며 반겨주던 기억이 난다"면서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루트를 따라 이 학교를 다시 찾아 교실에 내 사진이 붙어 있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서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고려인 3세 김 예브게니아 씨는 이날 통역과 안내를 맡아 분주한 가운데서도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마티국립대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이 학교에 부임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한국어를 전공하겠다고 하니 할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시며 한국에 관한 기억을 들려주시더군요. 예전에는 이 일대에 고려인이 많이 살았는데 모두 도시로 이사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전통은 이어가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80년 전 역사를 더듬어보기 위해 모국에서 오신 방문단을 맞으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이어 고려인들의 첫 정착지인 바슈토베 마을에서 고려인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제가 열렸다. 2012년 카자흐고려인협회가 세운 기념비에는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의 척박한 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듯 황량한 들판이지만 그때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은 기념탑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착촌 일대는 공동묘지로 탈바꿈했고 토굴을 판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기념비 양옆으로 행사를 축하하는 대형 입간판이 세워졌고 맞은 편에는 가림막과 의자가 설치됐다. 연단 주변에는 카자흐스탄 깃발과 태극기가 펄럭였다.

카이라트 군수는 환영사를 통해 "카자흐스탄에 사는 43개 소수민족 중 고려인들이 26명이나 노동영웅을 배출하는 등 카자흐스탄 경제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고 지금도 한국과 카자흐스탄 우호 협력의 가교 구실을 하고 있다"고 치하했다.

이창주 집행위원장은 "회상열차 탐사단을 따뜻하게 맞아준 카이라트 군수와 이 블라디미르 카라탈군고려인협회장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면서 "고난과 통곡의 길을 떠나오면서도 새로운 개척의 역사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카자흐스탄 국민께도 경의를 표한다"고 답례했다.

이부영 공동대회장(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고려인 영령들에게 "역사는 기억이고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면서 "다시는 20세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고 민족 분열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고려인 영령들이 보살펴 달라"고 기원했다.

함세웅 공동대회장(천주교 원로신부)은 "하느님, 알라, 그리고 조상들께 고려인을 포함한 모든 소수민족 강제이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침묵의 기도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회상열차 탐사단원인 광주고려인마을의 시인 김 블라디미르 씨는 "내 민족에게 있었던 이 비극을 잊어서도 안 되고 되풀이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하여 회상열차는 후세에게 다짐하는 서약열차가 됩니다"란 구절이 담긴 헌시를 낭송했다.

시인 윤고방 단원은 "깃발을 흔드는 바람이여, 지평선에 흐르는 구름이여,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잠 못 이루는 한 톨의 외로운 씨앗을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어 주오"로 시작되는 시 '우슈토베의 하늘에 고함'을 소개했다.

탐사단원들은 4살 때 부모를 따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가 미국을 거쳐 한국에 살고 있는 이다미 씨의 선창에 따라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80년 전 강제이주를 직접 경험한 곽응호(곽 미하일 니콜라예비치·95) 씨와 천억실(천 미하일 다니옐로비치·92) 씨가 증언에 나서는 순서도 마련됐다.

고령임에도 허리가 꼿꼿하고 목청도 카랑카랑한 두 노인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비장한 표정을 짓다가도 모처럼 고국의 동포들을 만난 반가움에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을 만난 탐사단원들도 고향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만나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주최 측이 미리 준비한 선물을 건네긴 했어도 가방에서 손톱깎이, 부채, 휴대용 선풍기 등을 꺼내 '필요할 때 쓰시라'며 이들 손에 쥐여주는 단원들도 있었다.

주변의 바슈토베 벌판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친 황무지였고 첫 정착지임을 알리는 기념비도 외롭게 서 있지만 강제이주 고려인 1세들과 모국 동포들이 마주 잡은 손에는 정겨움이 넘쳐 흘렀다.

이로써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흔적을 찾는 회상열차 여정은 일단 마무리됐다. 탐사단원은 이날 오후 버스로 5시간을 달려 알마티에 도착했다. 2일과 3일 국제한민족재단이 알파라비 카자흐스탄국립대에서 '남북한 정세와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이란 주제 아래 개최하는 제18회 세계한민족포럼에 참여한 뒤 4일 귀국길에 오른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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