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총은 장수왕릉 아냐"…평양 천도한 그의 무덤은 어디에
기경량 강사 "평양 경신리 1호분" 주장…고대사학회 '왕릉고고학' 세미나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구려 제20대 왕인 장수왕(재위 412∼491)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과 함께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백제 개로왕은 475년 목숨을 잃었고, 백제는 위례성에서 오늘날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했다.
삼국시대 대부분의 왕과 마찬가지로 장수왕의 무덤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을 장수왕릉을 보는 학설이 가장 널리 알려졌으나,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도 많다.
한국고대사학회가 지난 27∼28일 충남 공주에서 '한국 고대사와 왕릉고고학'을 주제로 개최한 하계세미나에서 기경량 가천대 강사는 '고구려 왕릉의 장지와 피장자 문제'에 대해 발표하면서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견해를 부정했다.
기 강사는 "고고학적으로 장군총이 조성된 연대는 5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장수왕의 사망 시점이 491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에 왕이 살아 있을 때 무덤을 만드는 수릉(壽陵) 제도와 망자가 고향이나 가문의 근거지로 돌아가 묻히는 귀장(歸葬) 제도가 존재했어야 장군총이 장수왕릉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 강사는 "고구려에서 수릉제나 귀장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은 여러 차례 지적됐다"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천도를 단행한 장본인이 60년 넘게 지내온 새 왕도를 떠나서 새삼스럽게 옛 왕도로 돌아가 묻혔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수왕릉은 평양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장수왕의 무덤은 과연 무엇일까.
기 강사는 지금까지 평양의 무덤 가운데는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전(傳) 동명왕릉과 시가지에서 동북쪽으로 30㎞ 거리에 있는 경신리 1호분이 장수왕의 무덤으로 거론돼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가운데 경신리 1호분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하면서 와당(瓦當, 막새기와)과 무덤의 구조, 위치를 근거로 제시했다.
경신리 1호분은 '한왕묘'(漢王墓) 혹은 '황제묘'(皇帝墓)로 불렸던 무덤이다. 사각형 석축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흙을 쌓은 형태로, 지름은 54m에 이르고 높이는 약 12m다.
이 무덤의 특징은 평양 고분 중 드물게 석실 상부에 와당과 기와로 덮은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 강사는 "지안의 왕릉급 고분에서는 와당과 기와가 다수 출토됐다"며 "국내성 시기에 만들어진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 왕릉의 제도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경신리 1호분에서 나온 연꽃무늬 와당의 모습이 크게 두 가지라고 설명한 뒤 이를 근거로 무덤의 축조 연대를 5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 강사는 "경신리 1호분은 대동강이 보이는 산기슭에 있는데, 이러한 입지는 지안 지역 적석총 왕릉과 유사하다"며 "장수왕은 평양 일대에서 자신의 고향과 가장 비슷한 경관을 가진 곳을 선정해 묻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 동명왕릉을 장수왕릉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출토품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번 세미나에서는 고구려 외에도 백제, 신라, 가야, 발해 무덤 발굴의 새로운 성과와 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정리한 논문이 발표됐다.
한국고대사학회장인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왕릉 연구와 관련된 고고학과 문헌 사학의 최신 정보를 공유하고 논의하기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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