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진 美국경문턱에 트레일러 밀입국…폭염속 결국 참사
2003년 텍사스 19명 사망 이후 비극 재연…당일 최고기온 38도
英컨설팅업체 "트럼프 강경책으로 위험한 밀입국 시도 늘어나"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 미국에서 또다시 밀입국자 집단 사망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23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 주(州) 샌안토니오의 월마트 주차장에 있던 트레일러에서 9명의 사망자와 30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나온 이번 참사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AP 통신에 따르면 지난 2003년 5월 텍사스 남부에서 휴스턴으로 가던 트레일러에 탄 멕시코와 중미 출신 밀입국자 100여 명 가운데 19명이 숨진 적이 있었다.
당시 뜨거운 트레일러에 갇혀 호흡 곤란을 겪던 탑승자들이 차벽을 두드리며 고통을 호소했으나, 검문을 두려워한 미국인 운전사가 트레일러를 떼어놓고 트럭만 몰고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참사로 이어진 것이다.
지난해 10월에도 멕시코 베라크루스 주(州)에서 55명의 불법이민자를 싣고 미국 국경을 넘으려던 트럭에서 4명이 질식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참사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최근 계속된 폭염과 차량 내부의 환경이다.
샌안토니오 사건 현장에 출동한 찰스 후드 소방국장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너무 뜨거웠다"고 전했다.
사건이 벌어진 22일 샌안토니오의 최고 기온은 섭씨 38도까지 올라갔는데 이 경우 주차된 차의 내부 온도는 10분 만에 49도가 된다고 새너제이 주립대 잰 눌 교수가 밝혔다. 같은 조건에서 차 내부 온도는 주차 20분 뒤 54도까지 도달한다.
에릭 어니스트 네브래스카 대학병원 조교수도 AP에 "그런 온도를 견디는 것은 위험하다"며 "인체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혹한 조건"이라고 말했다.
높은 습도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습도가 너무 높으면 땀이 증발하는 속도가 느려져 체온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다.
열사병을 피하려면 수분을 충분히 섭취해야 하지만 밀입국자들을 실은 트레일러에는 물이 없었던 것으로 수사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결국 열악한 환경에 처한 불법 밀입국자들은 탈수, 이상고열, 질식 등의 증상에 시달리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집단 참사의 위험에도 대형 트레일러나 트럭을 밀입국자 수송에 사용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실어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찾거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대도시로 가려는 불법 이민자들을 한 번에 최대한 많이 실어야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불법이민 알선조직의 계산이다.
존 켈리 미 국토안보부 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 "불법이민 알선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맹비난했다.
또한, 미-멕시코 국경의 문턱을 높이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위험을 무릅쓴 밀입국 시도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컨설팅업체인 베리스크 메이플크로프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해진 국경 보안 정책은 이민자들이 더 위험한 밀입국 방법을 감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 국경수비대에 따르면 올해 7월에만 텍사스 주 러레이도 인근에서 불법 입국자를 실은 트럭이 최소 4대 적발됐다. 지난 7일에는 멕시코, 에콰도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출신 72명을 태운 트럭이 발견된 바 있다.
통상 이들은 기차, 버스, 자동차를 이용해 미국과의 국경 근처로 이동한 뒤 걷거나 뗏목을 타고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불법이민 알선조직이 마련한 트레일러에 탄다고 AP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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