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초상' 40년 작업 잠시 밀쳐놓고 '가출한 화가' 정복수
서촌 사루비아다방서 8월 4일까지 개인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그림만 그리던 화가가 나이 예순둘에 '가출'을 감행했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의 한 건물 지하에 있는 전시공간인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사루비아 다방)이 가출한 작가 정복수의 아지트다. 그는 올여름 초입부터 경기도 안성의 작업실을 떠나 이곳에서 먹고 자고 붓질을 하는 중이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에게 즉석 안내도 하고, 지인들이 찾아오면 이야기도 나눈다.
최근 사루비아다방에서 만난 작가는 반소매 티셔츠, 반바지 아래 연분홍색 슬리퍼를 신은 모습이 서촌에 마실 나온 동네 '아재' 같았다.
"가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는데 생각만 맴돌고 몸이 말을 안 듣더라고요. 너무 내 생각에 갇혀 있었으니까, 좀 벗어나고 싶었죠. 다른 생각도 하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가 스스로 가뒀던 '내 생각'은 인간 신체의 끊임없는 탐구다.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라난 작가는 1976년 상경, 홍익대 미대에서 공부했다.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것이 서양미술을 흉내 내는 정도밖에 안 되구나"라는 생각에 선택한 것이 인간을 그리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 나름대로 그려낼 수 있다면 그림으로서 어느 정도 가치는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사람 그리는 걸 좋아했던 영향도 있었고."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 지난 40년간 표현해온 '몸의 초상'이다.
오장육부가 묘하게 얽히고설킨 모습에 일부는 인상을 찡그릴 수도 있겠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신체를 아름답거나 완벽하게 그릴 생각은 안 했느냐'는 물음에 작가는 "원래 사람이라는 게 희한한 동물 아니냐. 희한한 동물을 예쁘게 그리면 거짓"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작가는 '몸의 초상'을 그리면서도 그림도구와 살림살이를 리어카에 싣고 전국을 돌면서 풍경을 그리고 싶었던 17살 때 꿈을 계속 간직해 왔다고 했다. 중견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루비아다방 덕분에 그 꿈을 이루게 됐다.
전시공간이면서 작업실이기도 한 이곳에는 남포동, 범내골, 청사포 등 어릴 적 부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다. '몸의 초상'을 그린 작가의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던 작가는 "작품성에서 마음에 좀 안 찬다"고 말했지만, 옅은 수채 풍경 넘어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는 눈빛에는 그리움과 애정이 묻어났다.
그 맞은편에는 '복수피아'(정복수와 유토피아를 합친 단어)라고 이름 붙였다는, 낙원의 풍경 시리즈가 걸렸다. 전시장에 깔린 거대한 백지에 '몸의 초상' 바닥화 시리즈를 그리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관훈 큐레이터는 "정복수에게 '가출'은 상징적인 의미이자 창작 화두"라면서 "아직도 인간을 반(半)의 반도 그리지 못했다는 그는 그림밖에 모르던 소년 시절처럼, 다시금 몸을 바라보는 기억의 원형에서 꿈을 펼치려 한다"고 설명했다.
어릴 적 꿈을 반세기 만에 이룬 작가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그림은 완벽할지 몰라도 작가 정신이나 현실 인식은 찾아볼 수 없는" 작품들이 평가받는 한국 미술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때와는 달리, 수줍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작가는 "영감이 꽉 차 있긴 한데 비밀…"이라며 웃었다.
정복수 개인전 '가출한 화가'는 8월 4일까지 계속된다. 문의 ☎ 02-733-0440.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