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나주읍성, 옛 모습 되찾는 호남의 '千年古都'

입력 2017-08-07 08:01
[연합이매진] 나주읍성, 옛 모습 되찾는 호남의 '千年古都'

(나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호남의 곡창인 나주평야를 넉넉하게 품고 있는 나주는 호남의 천년고도다.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따 전라도라는 이름을 지었듯이 나주는 고려 성종 때 목(牧)으로 지정된 이후 구한말까지 1천여 년 동안 호남의 행정·경제·군사·문화 중심지였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300여 명의 목사(지방관)가 파견됐고, 조선 후기에는 곡식 세금이 전국 1위, 인구는 5위를 차지했다. '천년목사 고을'로 불리는 이유다.





나주읍성은 고려 건국과도 무관치 않다. 후삼국 때 왕건은 영산강 일대에서 견훤군에 크게 승리하고 난 뒤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과 혼인했고, 이 지역을 근거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오 씨는 2대 왕 혜종의 모후인 장화황후가 됐고, 나주는 고려 왕조의 '외갓집'이 됐다.

나주읍성(사적 제337호)은 고려 시대 왜구방어를 위해 쌓은 토성으로 조선 초기 석축성으로 고친 평지 읍성이다.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451m)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형으로 북악산과 한강을 품고 있는 한양의 지세를 닮았다. '작은 한양'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읍성의 둘레는 3.5㎞, 성벽의 너비는 6m, 면적은 97만3천여㎡에 이른다.

한양 도성처럼 동서남북 방향으로 동점문(東漸門), 서성문(西城門), 남고문(南顧門), 북망문(北望門) 등 4대문이 있다. 사신과 중앙관리들의 숙소였던 금성관, 지방관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 나주목사의 살림집이던 목사내아 등 관아의 규모와 위상은 전국 제일이었다. 정조의 꿈이 담긴 조선 최초의 신도시인 수원화성 면적이 37만1천145㎡이니 당시 나주읍성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이런 문화유산들이 훼손됐거나 사라졌다.

양순용 문화관광해설사는 "나주읍성과 4대문 복원 사업을 통해 나주목이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며 "4대문과 서성벽길, 목사내아, 금성관, 나주향교 등을 통해 나주가 호남의 중심지였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 영산강이 가로지르는 '작은 한양'



맨 먼저 들를 곳은 4대문 중 동쪽에 우뚝 서 있는 동점문이다. 동점이란 명칭은 '동쪽으로 점점 흘러 바다에 이른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에서 유래됐다. 읍성을 가로지르는 나주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영산강을 만나 바다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동점문은 옹성이 설치된 2층 문루다. 홍예문식 성문의 바깥에 'ㄱ' 자 모양의 옹성을 둘러쳐 방어력을 높였다. 읍성 바깥쪽에는 목책을 이중으로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어 사라졌다가 2006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됐다.

동문 밖의 석당간(보물 제49호)은 고려 초 나주의 터를 정할 때 배 모양인 행주형 지세를 가진 나주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돛대로 세웠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엔 '동문 밖에는 석장(石檣), 동문 안에는 목장(木檣)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장(檣)은 돛대를 뜻하는데 돌기둥 높이가 11m에 이른다. 영산강이 범람하면 바로 석당간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동점문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는 목사내아와 금성관(錦城館·전남 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다. 왕을 상징하는 지방궁궐이자 객사로 사용된 금성관은 조선 시대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금성관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셔놓고 한양 궁궐 쪽을 향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외삼문인 '망화루'를 지나면 너른 대지 위에 중삼문이 서 있다. 담장이 없는 문을 스치면 중앙에 정청(政廳)인 금성관이 있고 동서쪽에 객사가 나란히 자리한다. 금성관은 다른 객사 정청과는 달리 팔작지붕으로 이뤄져 있는데, 일제는 나주의 위상을 훼손하기 위해 내부를 개조해 군청으로 이용했다. 동쪽에 붙어 있는 객사인 벽오헌(碧梧軒)마루에 앉으면 금성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간 또한 느릿느릿 흘러가는 느낌이다.

금성관 뒤뜰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옛 번영의 흔적이 금성관 곳곳에 생채기로 남아 있다. 동신대 문화박물관은 2015년 동측 부지에서 국내 현존하는 지방 관청 중 최대 규모의 조선 시대 연못 터와 정자 터를 발견했다. 현재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장방형 연못은 길이 64m, 너비 20m이다. 분청자·백자 등 도자기 편과 목제·철제 등 건축 부재, 지붕 처마를 장식했던 암·수막새와 암·수키와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됐다.

망화루 앞 광장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이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 300명을 모아 출병식을 연 곳이다.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당시 향을 피우고 통곡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곰탕 간판을 단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망화루 서쪽으로 동헌의 출입문인 '정수루'(正綏樓)가 서 있다. 2층에 있는 북은 '원통한 일을 말하고 싶을 때 치라'고 나주목사였던 학봉 김성일이 달았다고 한다. 정수루 바로 옆에는 나주목의 역사·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나주목문화원이, 뒤쪽으로는 동헌 터와 나주목사의 살림집인 금학헌(琴鶴軒ㆍ전남 문화재자료 제132호)이 남아 있다.

목사내아는 'ㄷ' 자형 안채와 'ㅡ' 자형 문간채로 구성돼 있는데 조선 후기 상류층의 생활공간을 엿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래의 형태와 다르게 변했으나 최근 복원 작업을 거쳐 조선 시대 관아 건축의 원형을 되찾아 한옥체험관으로 쓰이고 있다. 나주목민들이 상소를 올려 나주로 두 번이나 부임했던 유석증 목사와 김성일 목사의 이름을 딴 방이 있는데 이곳에서 숙박하면 좋은 일들이 생겨서 소원을 이룬다고 한다. 마당 한쪽의 벼락 맞은 팽나무는 큰 덩치만큼 수령이 500년이 넘는데 소원을 빌면 꿈이 이뤄진다고 한다.

내아를 나와 골목을 따라가니 영금문(映錦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서성문이 의젓하게 서 있다. 2011년 복원된 서성문의 현판은 1815년 발간된 '나주목여지승람' 서문의 '영금문으로 기록된 편액이 있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서성문은 가장 비극적이고 치열한 전투의 아픔을 품고 있다.

바로 동학군과 관군의 슬픈 사연이다. 1894년 음력 7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두 차례 서성문을 공격했으나 끝내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며 대패했다. 양순용 관광문화해설사는 "당시 목사와 향리, 그 일가권속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동학군과 싸워 읍성을 지켰지만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사라지게 됐다"고 말한다. 허물어진 성벽에 서니 제폭구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눈에 밟혀 발걸음이 쉬 떨어지질 않는다.

현재 서성문을 기점으로 250m 정도 범위에서 옛 나주읍성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일제는 나주읍 개발을 핑계로 성문을 허물었고, 일제의 토지 수탈로 제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남은 성벽을 해체한 뒤 그 위에 오두막을 짓거나 텃밭을 만들었다. 최근까지 무너진 성벽 위로는 무허가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나주시는 일부 성곽을 본모습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서성문을 지나 읍성 밖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춘 나주향교가 있다. 나주향교는 한양의 성균관처럼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앞에 있고, 학문을 배우는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띤다. 그래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이 건물을 참조했다고 한다.

나주향교의 대성전(보물 제394호)은 나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태종 7년인 140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자의 고향인 산둥 지방에서 가져온 흙으로 벽을 발랐다는 대성전은 수백 년을 견뎌낸 위엄이 서려 있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나주향교의 오랜 역사를 웅변한다. 대성전 뒤로 명륜당, 그리고 그 양쪽에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 마한문화 흔적 찾아가는 시간여행

나주는 6세기 중엽까지 존속된 마한(馬韓)의 중심지로, 거대한 고분과 대형 옹관,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수준 높은 문명을 갖고 있었다. 특히 낮은 구릉지에 산재한 크고 작은 고분군은 마한의 역사가 잠든 유적지다.

반남고분군은 대안리 12호분(국가사적 제76호), 신촌리 8호분(국가사적 제77호), 덕산리 14호분(국가사적 제78호) 등 총 34호분으로 이뤄졌다. 피라미드형, 원추형, 사각형 등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데, 백제의 석실분과 신라의 적석목곽분 등과 구별되는 옹관고분(독널무덤)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까지 4세기 동안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대형 옹관고분은 지상에 분구를 쌓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관을 매장하는 방식이다. 1917년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신촌리 9호분에서는 12기의 옹관이 확인되었고, 백제나 신라 양식과 다른 금동관(국보 제295호)이 출토됐다. 탁 트인 들판 한가운데 솟아있는 무덤들은 봉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 유물이 사라졌는지, 잃어버린 옛 왕국의 자취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인근의 국립나주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기면 지난 5월 8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향 품으로 돌아온 '서성문 안 석등'(보물 제364호)과 마한의 생생한 역사를 만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조산(造山, 흙을 쌓아서 만들어 놓은 산)이라고 불렀던 복암리 고분군(국가사적 제404호)은 1996년 발굴되어 그 신비함이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 말기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경지정리로 7기의 조산 중 3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4기인데 이 중 제일 큰 3호분은 안동 권씨의 선산으로 이용돼 도굴당하지 않았다.

네모 반듯한 논 한가운데 돌올하게 솟아있는 이곳에서는 금동신발, 은제장식, 큰칼, 구슬, 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옹관묘, 횡혈식 석실묘 등 41기의 다양한 묘가 한 봉분 안에 촘촘히 조성돼 '아파트형 고분'이라고 불린다.

복암리 고분군과 400여m 떨어진 복암리고분전시관은 복암리 3호분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은 곳으로 다양한 묘제와 대형 옹관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3.28m 크기의 대형옹관은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옹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이수진 학예사는 "복암리 3호분은 한 번에 묻힌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차례로 매장된 것"이라며 "한 분구 안에서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는 복합묘제고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라고 말한다.

나주의 고분군은 경주나 부여의 고분군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기록 없는 마한 역사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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