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견뎌낸 농촌 야생동물 극성…고구마·복숭아밭 쑥대밭
단맛 돌기 시작한 농작물 먹기 위해 초저녁부터 농경지 '어슬렁'
작년 충북서 멧돼지·고라니 2만마리 포획했지만 피해 줄지 않아
(청주=연합뉴스) 박병기 김형우 기자 = 충북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 사는 임헌칠(76)씨는 요즘 엉망으로 변한 고구마밭을 볼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가뭄이 극심했던 지난달 물까지 짊어져 나르면서 정성들여 돌본 고구마 넝쿨이 쟁기로 갈아엎은 것처럼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뽑혀졌기 때문이다.
그의 밭이 멧돼지 습격을 받은 것은 닷새 전부터다. 여러 마리가 1천㎡의 고구마밭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면서 넝쿨을 뽑아놓고 뿌리를 캐 먹는 등 말썽을 부리고 있다.
밭 주변에는 야생동물 접근을 막기 위해 비닐끈과 차광망 등으로 울타리를 쳐놨지만, 허기진 멧돼지한테는 아무 쪽에도 쓸모가 없다.
임씨는 "영리한 멧돼지가 들깨와 고추가 자라는 밭고랑은 그대로 두고 고구마만 골라서 먹고 있다"며 "군청에서 보내준 엽사들이 추적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포획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인접한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 이영미(67·여)씨는 하루가 멀다하고 밭에 출몰하는 멧돼지를 쫓기 위해 밤잠까지 설치면서 순찰을 돈다.
이달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멧돼지는 밭고랑을 파 일구고, 단맛이 돌기 시작한 복숭아를 노려 나뭇가지를 마구 부러뜨리는 등 심각한 피해를 내고 있다.
이씨는 "깡통을 매달아 소리를 내고, 라디오도 틀어놔 보지만, 신출귀몰하는 멧돼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며 "밤마다 밭 주변에서 긴 막대 등으로 땅바닥을 내리쳐 멧돼지를 쫓고 있다"고 말했다.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서 오이와 고추 농사를 짓는 정종호(67)씨는 한 달 전부터 출몰하는 고라니 때문에 농사를 접어야할 판이다.
고라니들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밭을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오이의 새순을 잘라먹고 고춧대를 부러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몇 해 전 큰돈 들여 밭 주변을 전기 울타리로 둘러쌌다. 그러나 점프력 좋은 고라니는 이를 비웃듯이 울타리를 훌쩍 뛰어 밭을 드나들고 있다.
정씨는 "처음에는 도둑이 들었나 생각했는데, 밭고랑에 찍힌 발자국을 통해 고라니 짓임을 확인했다"며 "이들의 횡포가 한 달째 이어지면서 남아나는 농작물이 없을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극심한 가뭄에 고통받던 충북지역 농경지가 이번에는 멧돼지·고라니 등 야생동물 피해에 시름하고 있다.
가뜩이나 가뭄에 이은 폭염으로 농작물 작황이 시원찮은 편이어서 이들 지켜보는 농민들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올해 옥천군에는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신고가 308건이나 들어왔다. 제천시에도 295건이 접수됐다. 대부분 멧돼지나 고라니 피해를 호소하는 신고다. 비가 내려 농작물 생장이 빨라지기 시작한 이달에는 하루 10여건 넘게 신고가 폭주한다.
옥천군 유해 야생동물 자율구제단에서 활동하는 엽사 곽길상(59)씨는 "장마가 시작된 뒤 야생동물 횡포가 한층 심해졌다"며 "주로 새벽이나 심야에 출몰하던 멧돼지가 초저녁부터 농경지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고 심각성을 설명했다.
한상훈 국립 생물자원관 연구관은 "대개 5∼6월 출산하는 멧돼지는 요즘 새끼를 키우기 위해 양질의 먹이를 찾아 나서는 시기"라며 "단맛이 돌기 시작한 농작물은 이들에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새끼가 있는 어미 멧돼지는 신경이 날카로워 공격성이 강해진다"며 "농경지 주변에서 마주치더라도 함부로 쫓거나 대응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의뢰해 포획해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는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작년 충북에서 피해 보상에 지급된 예산만 697건, 4억7천100만원에 이른다.
충북도 관계자는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매년 증가해 보상금이 늘어나는 추세고, 전기 울타리 설치 등 피해 예방사업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는 올해 농작물 피해예방사업에 8억2천300만원을 투입한다.
일선 시·군은 개체수가 불어난 유해 야생동물을 솎아내기 위해 경험 많은 엽사 등으로 자율구제단(피해방지단)도 운영한다.
이들은 시·군청과 실시간 연락망을 구축해 놓고 농민한테서 신고가 들어오면 곧바로 현장에 나가 문제를 일으킨 야생동물을 퇴치한다.
지난해 농경지 주변서 이들에게 포획된 멧돼지는 1천548마리, 고라니는 1만9천202마리에 달한다.
bgipar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