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고려인의 한(恨) 서린 시베리아횡단철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시베리아횡단열차(TSR)의 종착지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에는 '9288'이라고 새겨진 기념탑이 서 있다. 이곳에서 출발지 모스크바까지의 거리 9천288㎞는 어림잡아 북극에서 적도에 이르는 거리다. 총 156시간(6박7일)을 달려 56개 역을 지나고 16개의 강을 건너는 동안 7시간의 시차가 생긴다. "지구의 크기를 몸으로 직접 느끼려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보라"는 말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인류의 대역사(大役事)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시베리아횡단철도 부설공사는 1891년 3월 17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철도 건설에 관한 칙령을 공포해 시작된다. 황태자 니콜라이 2세는 기공식을 주관하기 위해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길에 일본에 들렀다가 테러범의 습격을 받는다. 큰 부상을 면한 황태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그해 5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착공 테이프를 끊는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우랄산맥까지는 이미 철도가 놓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8천800㎞가 실제 공사 구간이었다. 서시베리아, 중앙시베리아, 환바이칼, 자바이칼, 아무르, 우수리 구간으로 나눠 공사가 진행됐다. 예카테린부르크 남쪽의 첼랴빈스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에 이르는 서시베리아 구간은 1895년 10월 가장 먼저 완공됐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의 중앙시베리아 구간과 맨 마지막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우수리 구간도 1897년 공사를 마쳐 열차가 지나다녔다. 바이칼호 동쪽 미소바야에서 스레텐스크까지의 자바이칼 구간은 1895년 4월 착공해 1900년 1월 완공했다.
환바이칼 구간(이르쿠츠크∼미소바야)은 200여 개의 교량을 놓고 39개의 터널을 뚫는 난공사를 거쳐야 했다. 처음에는 열차를 페리 기선(겨울에는 썰매)에 실어 바이칼호를 건너게 했다가 바이칼호 남쪽 연안을 따라 운행하는 철도를 건설, 1904년 10월 완공했다. 기술적 문제와 비용 부담에 고심하던 아무르 구간(스레텐스크∼하바롭스크)은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부설권을 따내 건설한 둥칭(東淸)철도(지금의 만주횡단철도·TMR)로 대신하게 해 일단 1905년 10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러일전쟁에서 패해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둥칭철도 남쪽 구간을 일본에 내주게 되자 북쪽 구간까지 빼앗길 것을 우려해 1908년 4월 뒤늦게 러시아령을 지나는 아무르 구간 공사를 재개했다. 착공한 지 25년 5개월 만에 1916년 10월 18일 마침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완성했다. 착공에서부터 완공까지 모든 과정을 지휘한 니콜라이 2세는 철도 개통 4개월 만에 일어난 2월혁명으로 폐위됐다가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다.
철도의 종착지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러시아 동진정책의 산물인 만큼 러시아 동단과 맞붙은 한반도의 한민족과 개통 초기부터 깊은 연관을 맺었다. 헤이그 특사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만나 1907년 5월 21일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보름 후인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1911년 의병대장 이범윤이 이르쿠츠크로 유배되고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와해된 독립군 잔류 병력이 포로로 끌려갈 때도 이 열차에 몸을 실었다. 1925년에는 조봉암이 모스크바 국제공산당 본부에 조선공산당 창립을 알리려고 탑승했고,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1927년 남편 김우영과 이 길을 따라 세계일주에 나섰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이광수의 소설 '유정'에 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33년 발표된 '유정'은 주인공이 세상을 등진 채 시베리아로 향하자 여주인공이 그를 찾아 나서는 줄거리를 담고 있는데, 열차를 타고 가는 여정과 바이칼호의 풍경 등을 상세히 묘사해놓았다. 이광수는 22세 때인 19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부임하려고 시베리아와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려다가 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러시아에서 발이 묶여 6개월간 시베리아 중남부의 치타에 머물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손기정과 남승룡도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출전길에 올랐다. 6월 1일 도쿄를 출발해 기차와 배로 서울에 도착한 일본 마라톤 선수단은 6월 4일 서울역을 떠나 신의주, 단둥, 선양(당시 봉천), 하얼빈을 거쳐 치타에서 열차를 갈아탄 뒤 17일 베를린에 입성했다.
1937년에는 소련의 스탈린 정권이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7만∼20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열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태워 옮기는 과정에서 2만 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표면적 이유는 '일본 간첩 행위의 침투 방지'였지만 학자들은 중앙아시아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는 동시에 고려인들의 조직화를 막고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만주횡단철도를 거쳐 경의선(서울∼신의주)과 이어진다. 2000년 이후에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신의주에서 중국횡단철도(TCR)를 거쳐 연결하거나 원라선(원산∼나진)과 곧바로 잇는 이른바 '한반도횡단철도(TKR) 대륙 연결망' 구상이 몇 차례 발표되기도 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레일 간격이 우리나라와 중국 등에 놓인 표준궤(1천435㎜)보다 넓은 광궤(1천520㎜)여서 연결 지점에서 바퀴와 차축 등을 갈아 끼워야 한다. 2014년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은 궤도 폭이 달라도 바퀴 교체 없이 운행할 수 있는 가변고속대차 기술을 개발했다. 부산에서 유럽에 이르는 철도가 이어진다면 물류비용 절감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오는 23일 오후 7시 10분,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한다. 각계 인사로 구성된 86명의 탐사단은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 6천500㎞의 여정을 되짚어가며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보고 한반도 평화와 한민족공동체 발전 방안을 모색한다. 80년 전 고려인들을 태우고 '죽음의 행로'를 달렸던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이제 우리를 남북 화해와 동북아 번영의 길로 이끌 수 있을지 자못 기대가 크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