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김제 하소백련축제
불 속에서 청초한 연꽃이 활짝 피어나다
(김제=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푸른 새우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이름 붙여진 전북 김제의 청하산(靑蝦山). 이 산기슭에 하얀 연꽃이 곱게 피어난 연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새우 하(蝦) 자와 늪 소(沼) 자의 하소백련지(蝦沼白蓮沚).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해진다는 청하포란형의 이곳 길지에서 해마다 7월이면 백련(白蓮)을 앞세운 축제가 열려 마음의 여유와 청정함을 되찾게 해준다.
사위 고요한 이른 아침. 은빛 물방울들이 연잎 위에 옥구슬처럼 깜찍하게 안겨 있다. 이윽고 물방울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푸른 비탈을 따라 또르르 굴러내린다.
하루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을까? 청하산 청운사(靑雲寺) 아래로 층층이 조성된 하소백련지에 부드러운 남풍이 건듯 불어오자 푸른 연잎들은 물결처럼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뒤질세라 하얀 연꽃들도 덩달아 어깨춤을 추며 새 아침을 해맑게 노래한다.
"꽃잎 팡팡 터지는 연꽃의 새벽 향기가 참으로 은은해요! 지금처럼 신선한 바람이라도 불어올라치면 그 향기는 더욱 깊게 느껴지고요!"
연못 정자에 걸터앉아 풍경을 조용히 완상하던 소리꾼 이강근(65·무향소리연구원 원장·서도창 중요무형문화재 41호) 씨는 "꽃도 곱고 아름답지만 향기가 정말 끝내준다"면서 "야, 향 좋다!"를 탄성처럼 거푸 외쳤다.
이에 화답하듯 주변의 대밭과 솔밭에선 온갖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요란하다. 그 위로는 백로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오르며 연못의 백련과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후두둑! 후두두둑! 후두두두둑!
잔뜩 흐린 하늘은 기어코 빗물을 쏟아 내리기 시작했다. 연잎을 마구 두드려대는 크고 작은 빗방울들의 소리가 영락없이 타악기 연주를 닮았다. 대자연이 연출하는 대향연! 이렇듯 하소백련축제의 한마당은 인간에 앞서 자연이 먼저 신명 나게 펼쳐내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연못 정자의 천정에 쓰인 상량문 글귀가 새로운 느낌으로 눈에 들어온다.
'향을 보니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니 몸이 열린다'
◇ '청정무구·처염상정'의 연꽃
예부터 연꽃은 청결함과 무구함, 순수함을 상징했다. 진흙 속에서 나지만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고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어서다. 청정무구(淸淨無垢)! 말 그대로 연꽃은 맑고 깨끗하여 더럽거나 속된 데가 없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군자나 선비의 고고한 표상이었다.
처염상정(處染常淨)도 같은 의미다. 흙탕물에 뿌리를 내려두고 있으나 잎과 꽃은 언제나 청초하고 곱다. 더러운 흙탕에서 태어나 자라지만 결코 때 묻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천 리 밖으로 퍼뜨린다는 처오불염 방향천리(處汚不染 芳香千里) 역시 같은 맥락이다.
연꽃은 유달리 불교와 인연이 깊다. 연꽃이라고 하면 불교, 불교라고 하면 연꽃이 저절로 떠올려질 정도다. 삼라만상의 오묘한 법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여 만다라화(曼陀羅華)라고 했다던가. 오랜 수행 끝에 번뇌의 바다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른 수행자의 모습과 같다고 할 만큼 연꽃은 깨달음과 해탈, 대자대비의 상징으로 굳게 자리 잡았다. 불상이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있고, 스님은 가사인 연화의(蓮花衣)를 걸치며, 대중들이 연화회(蓮花會)에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홍련과 더불어 연꽃의 양 날개 격인 백련은 순백의 고결한 아름다움으로 더욱 사랑받아왔다. 불교경전의 하나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본래 '묘법백련화경(妙法白蓮華經)'이었음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한 사례라고 하겠다.
꽃이 하얀 백련은 꽃이 붉은 홍련과 크기 등에서 생태학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꽃과 뿌리가 홍련보다 작으나 약성이 상대적으로 강해 식용으로도 널리 사랑받는다. 홍련이 무 맛이라면 백련은 당근 맛이라고 할 만큼 그 뿌리가 갖는 개성이 독특하단다.
국내 대표적 백련지 중 하나인 김제의 하소백련지. 축제가 열리는 7월이 되면 그 향과 멋, 그리고 맛에 취해보려는 방문객들로 줄을 잇는다. 해발 높이 55m의 나지막한 청하산 자락에 펼쳐진 6만6천여㎡ 넓이의 하소백련지는 바로 위에 결가부좌를 틀듯 여여히 앉아 있는 청운사가 세상과 상통하고 공생코자 하는 취지에서 1995년 탄생시켰다. 전체 면적이야 무려 33만㎡에 달하는 전남 무안의 회산백련지에 견줘 매우 작지만 농촌살리기에 앞장선 청운사가 조성해 여름마다 순수민간 주도의 축제를 아담하게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아내와 함께 연꽃을 감상하며 연못길을 걷던 문용기(58·김제) 씨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우리 부부가 이곳 축제에 와보기는 처음"이라면서 "해맑은 연꽃과 경건한 사찰이 한데 어우러져 더욱 편안한 느낌을 안겨준다"고 만족해했다. 올해로 두 번째 축제 탐방이라는 조오현(49·전주) 씨도 "조그마한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축제치고는 내실이 있는 것 같다"며 "마음 편하게 산책하며 호젓함을 즐기기에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 '불 속에 핀 연꽃' 주제로 열흘간 펼쳐져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 마디/ 지친 나를 안아 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하소백련축제의 개막을 목전에 둔 7월 7일 오후. 청운사 무량광전 앞에 설치된 연지특설무대에서는 민간 기타동아리가 노사연의 가요 '바램'을 부르며 식전 무대를 뜨겁게 달궜다. 익산에서 온 5인조 공연단 '목마와숙녀'의 열띤 연주에 관람객들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며 시나브로 하나가 돼갔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뿐입니다'
올해로 16회째를 맞은 하소백련축제는 '화중생련(火中生蓮·불 속에 연꽃이 피다)'을 주제로 7월 7일부터 16일까지 열흘간 하소백련지와 청운사 일대에서 개최됐다.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7일 오후 5시부터 3시간 동안 펼쳐진 개막 공연. 심홍재 전주국제 행위예술제위원장의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 이날 공연은 재즈무용수인 전미례 한양대 외래교수의 플라밍고 춤, 익산 예사랑무용단의 축원무, 풀이무용단의 태평무, 어메이징 훌라팀의 훌라댄스, 황진이무용단의 진도북춤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차례로 이어져 분위기를 띄웠다.
관람객들의 눈길을 더욱 모은 공연 중 하나는 소리꾼 이강근 씨의 비나리. 전통 고깔과 복장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한 장구와 꽹과리를 동시에 치며 무대에 올라 축원가를 불렀다. "여기 오신 모든 손님들의 각 가정에 일 년 동안의 모든 액살을 물리치고 명과 복을 점지해주시오!"
이어지는 예사랑무용단의 성주풀이 축원무. 전통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7명의 단원들은 강중강중 내걷듯 무대를 오가며 부채춤을 추어댔다. 이와 함께 어메이징 훌라팀은 경쾌한 하와이 음악 '진주조개잡이(pearly shells)'의 음률에 맞춰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며 축제장에 신명을 더했다.
관람객 배혜정(61·익산) 씨는 "전통무용 부채춤이 오늘따라 더욱 곱게 느껴져요. 연꽃 분위기가 좋아 더 그럴까요?"라며 흡족한 표정. 경쾌한 음향에 제 흥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몸을 요리조리 흔드는 한 중년여성은 이름과 소감을 묻자 "내 이름요? 제발 묻질랑 마셔! 이렇게 축제장에서 오두방정을 떤 사실을 남편이 알면 나 혼난다구! 된통 혼나!"라면서도 흥겨움에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축제 이틀째인 7월 8일의 무대를 빛낸 주인공은 중견가수 정수라 씨. 정 씨는 '아! 대한민국' '환희' '청춘아 고맙다' '토요일은 밤이 좋아' 등을 줄줄이 선사했다. 테너 윤호중 씨의 '베사메무쵸'와 색스폰 연주자 신윤철 씨의 '샤방샤방' 등도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축제 사흘째인 9일에는 박기승 씨의 택견과 전북무형문화재 김해순 씨의 설장고, 주성용 볼레오무용단 감독의 춤이 무대를 차례로 수놓았다. 이들 공연은 승속(僧俗)이 손잡고 장르 구분 없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져 대동상생(大同相生)의 축제 의미를 더했다.
◇ 연꽃과 사람이 하나 된 축제 마당
하소백련지는 생긴 지 올해로 22년째로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이다. 불교태고종 사찰인 청운사의 주지 도원 스님은 1995년 충남 아산의 인취사에서 백련 여덟 뿌리를 가져와 지금의 연못자리에 심었다. 오래전부터 생산불교를 통한 농촌 살리기의 길을 모색해온 도원 스님은 지역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법을 모색하던 중 정토(淨土)의 상징인 백련에 주목했다.
해마다 연밭 면적을 넓혀 가면서 연잎밥, 백련떡갈비, 백련연자죽, 백련칼국수, 백련부침은 물론 백련수육, 백련동동주까지 연달아 개발했다. 이와 함께 연잎차와 연근 된장, 연근 간장 등을 새롭게 담갔다. 불교적·경제적 동기에 머물지 않고 종교, 지역, 계층 등 일체의 장벽을 뛰어넘어 모두가 한데 어우러지는 문화적 동기까지 충족하게 된 것이다.
청운사는 연밭에서 나는 수익금을 공유하기 위해 2000년대 초반에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에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영농조합법인 '하소백련'을 출범시킨다. '하소백련'의 장류제조사인 김계순(62) 씨는 "연근 된장의 경우 15년여 전부터 숙성해오고 있는데 초기엔 메주 띄우기가 어려워 여러 차례 실패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자리가 잡혔다"며 연못가의 노천 장독대를 보여줬다.
축제의 시작과 발전이 있기까지는 도원 스님의 공력이 컸다. 모두 열여섯 차례의 축제 중 세 차례를 빼놓고는 해당 지방자치단체 등 일체의 외부 도움 없이 자체 구성한 하소백련축제제전위원회 주도로 꾸준히 개최했다.
축제제전위원장인 도원 스님은 "지난 16년 동안 오던 비도 개막일만 되면 감쪽같이 그쳐 축제가 취소되거나 연기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올해 역시 잔뜩 흐리고 비를 내리던 하늘이 개막시간이 임박하자 구름 사이로 햇빛을 밝게 내비침으로써 방문객들에게 경이로운 신비감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대자연이 함께 연출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염화미소(拈華微笑)랄까. 탱화장(전북 무형문화재 27호)이기도 한 스님은 '연꽃과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뜻의 '연인동화(蓮人同和)'가 부제인 이번 축제에 자신이 그린 탱화와 달마도 60점을 전시했다.
한편 올 여름에도 하소백련축제를 비롯해 크고 작은 연꽃축제들이 전국 곳곳에서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23일 개막한 경기도 양평의 세미원연꽃문화제(~8월 20일)와 충남 부여서동연꽃축제(7월 7~16일), 태안연꽃축제(7월 15~8월 27일), 서울연꽃문화대축제(8월 5일·봉원사) 등이 대표적이다. 백련 축제로 규모가 가장 큰 전남 무안연꽃축제는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일로읍의 회산백련지에서 '사랑, 소망 그리고 인연'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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