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릴 수 있어 행복해요"…관악구 홀몸노인 뜻깊은 전시회
3040 재능기부로 60∼80대 어르신들 수채화·캘리그라피에 눈떠
까막눈 80대 할머니·남한 적응 못 하던 탈북자도 출품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서울 관악구에 혼자 사는 황경녀(87·여)씨는 일제강점기였던 어린 시절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한글을 몰라 이름 석 자조차 쓰지 못하는 그는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올해 초 돌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색연필과 도화지를 샀지만, 그림은 생각처럼 잘 그려지지 않았다.
황씨는 주변에서 '우리 동네에 있는 선의관악복지관에 가면 이웃인 젊은 친구들이 미술을 가르쳐 준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올해 4월 복지관을 방문했다.
'나이가 너무 많아 민폐가 되는 것 아닌가' 싶어 주저하는 마음으로 복지관 문을 연 황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60∼80대 또래 이웃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기 때문이다.
동아리 활동 3개월 만에 황씨는 멋들어진 수채화를 한 폭 완성했다. 서울의 고즈넉한 뒷골목 풍경을 노란 색채로 알록달록 그려낸 '골목길'이라는 작품이었다.
황씨는 생애 첫 수채화인 이 그림을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메트로미술관에 전시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그는 "나는 이름도 못 쓸 정도로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사람인데,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6일 한국선의복지재단 선의관악복지관은 이날부터 8일까지 메트로미술관에서 전시회 '함께하니 좋구나'를 개최한다.
복지관이 담당하는 관악구 성현동과 은천동에 사는 60∼80대 어르신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는 전시다. 성현동과 은천동은 서울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홀몸노인이 많은 지역이고, 이번 전시에 출품한 어르신들도 대부분 홀몸노인이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내 인생의 꽃길'을 주제로 그린 수채화와 팝아트 작품 34점을 비롯해 총 78점의 작품이 사흘간 전시된다.
6년 전 탈북해 남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홍영(59·여)씨도 과거 외로웠던 자신의 모습을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선으로 그려 이번 전시에 출품했다.
홍씨는 "남한에 와서 생활과 말과 글이 모두 달라 많이 위축돼 있었는데, 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작품을 만들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따뜻함을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전시는 성현동·은천동에 거주하는 30∼40대 여성 주민들이 동네 이웃 어르신들에게 재능기부로 미술을 가르쳐 열게 된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
3년 전 복지관을 찾아가 "재능기부를 하겠다"면서 수채화 테라피 강좌를 처음 개설했던 화가이자 주민 윤인애(36·여)씨는 "실은 숨 가쁘게 '정석'대로 살아온 나 자신에게 쉬는 시간을 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면서 "요새는 되레 수강생 어르신들에게 삶을 배우고 있다"며 웃었다.
선의관악복지관 이가영 사회복지사는 "젊은 미술 선생님들과 만학도들이 서로 이웃이다 보니 미술 수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서로 건강을 챙기면서 돌보는 효과가 생기더라"고 했다.
이 복지사는 "지역사회가 독거 어르신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은 무료 급식 같은 1차적 욕구 해결이 아니라 '나도 지역사회의 일원'이라는 고차원적 욕구를 해결해 드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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