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역사 2cm] '사약 약효 천차만별' 16잔 마시고도 멀쩡했다

입력 2017-07-05 08:00
[숨은 역사 2cm] '사약 약효 천차만별' 16잔 마시고도 멀쩡했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자신을 망한 왕조의 도승지로 비유했다.

김 전 실장은 최근 서울중앙지법 재판에서 대통령을 잘못 보좌한 책임이 있느냐는 변호인 질문에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받고 구속된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고 답했다.

"과거에는 망한 왕조의 도승지를 했다면 사약을 받았으니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 특검이 재판할 것도 없이 사약을 받으라고 독배를 들이밀면 깨끗이 마시고 끝내고 싶다"는 발언도 했다.

다만, "정치적 사건을 형법 틀에 넣어 자꾸 하려고 하니 수많은 증인을 부르게 돼 재판관에게 큰 폐를, 특검에게도 수고를 끼쳤다"며 특검 수사의 순수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블랙리스트 혐의에는 "비서실장은 대통령 수석비서관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김 전 실장이 언급한 도승지는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 격으로 조선 시대 왕명 출납을 담당한 승정원 수장이다.



승정원 업무는 도승지를 비롯해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명이 분담했다.

이들은 모두 정3품이지만 내부 위계질서가 엄격해 승지나 부승지는 도승지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관모를 벗지 못했다.

부승지는 취임 1년 동안 질병을 포함한 어떤 사유로든 결근해서는 안 된다.

도승지는 판서(정2품)보다 품계가 낮았지만, 왕을 가까이서 보좌한 특수성 때문에 위세와 권한은 정1품인 정승을 능가했다.

대통령 비서실장도 장관급이지만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는 물론, 국무총리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많았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도승지 출신 정승으로는 황희, 류성룡, 이이, 채제공, 이항복 등이다.

정조 시절 29세에 도승지에 오른 홍국영(748~1781)은 전횡을 일삼다가 강릉으로 유배돼 요절했다.

승정원은 무조건 왕명에 복종하지 않고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반대 의견을 올렸으며, 심지어 왕실 부조리를 들춰내기도 했다.

중종(1488~1544년)이 승정원에 붓 40자루와 먹 20개를 내려주면서 자신의 과오를 숨기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승정원 역할을 존중한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직무에 충실해지려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선조 22년(1589) 승지 윤국형은 왕자 임해군 등이 재물을 빼앗고 뇌물과 청탁을 받는다고 직언했다가 선조에게 밉보여 상주 목사로 좌천됐다.

승정원 관리가 거의 예외 없이 현직에서 승진했다는 점에서 지방 전출은 파격 인사였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언급한 사약을 사형수가 희망한다고 무조건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형벌제도의 근간인 명나라 대명률에는 사형 방식으로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형(교수형)과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만 규정할 뿐 사약 조항은 없다.

맹독성 사약은 역모나 패륜을 제외한 중범죄를 저지른 고위 관료나 왕실 가족에게 내리는 특혜성 처형이다.





따라서 사약을 받으면 왕의 처소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서 마시는 게 관행이었다.

교형과 참형보다 훨씬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사형제는 능지처참이나 거열형이다.

고통을 천천히 느껴가며 죽게 하는 능지처참은 팔다리와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이다. 능지(凌遲)는 언덕을 서서히 오른다는 뜻이다.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살점을 떼되 과다출혈로 죽지 않도록 조금씩 베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도록 하는 능지처참도 있다.

이런 극형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성행했다.

거열형은 팔다리와 목을 밧줄에 묶어 소나 말이 당겨서 찢어 죽이는 방식이다.

능지처참과 거열형은 군중이 지켜보는 저잣거리에서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서울은 세종대로 프레스센터 정문 부근에서 주로 이뤄졌다.

참수형 집행을 앞두고는 망나니 매수가 잦았다. 돼지 등 뇌물을 받으면 단칼에 죽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칼을 여러 번 휘둘러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참수형이나 교형도 공개 장소에서 집행돼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이 치욕을 느꼈다는 점에서 사약 마시기는 가장 고상했다.

머리카락조차 부모가 물려준 것이어서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투철한 유교관에 비춰보면 목이나 몸을 훼손하는 처형이 최악의 불효였다.

참형이나 거열형으로 죽은 시신은 백성이 보도록 한동안 전시했으나 사약으로 숨진 시체는 곧바로 수습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후궁 처형에도 사약을 활용했다.

비록 죄인이지만 왕의 여인을 다른 남자가 함부로 만지게 할 수 없다는 배려에서다.

사약은 왕실 의약 담당인 내의원에서 만들었으나 제조법은 비밀에 부친 탓에 자세한 성분을 알 수 없다.

고대 중국에서는 독수리와 비슷한 짐새 깃털을 술에 담가 생기는 독을 사약 제조에 쓴 것으로 알려졌다.

진나라(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이후에는 비소화합물인 비상을 활용했다.

조선 시대도 중국처럼 비상을 주재료로 사약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1788~1856년)이 집필한 과학기술서에 비상 제조법이 나온다.

비소 덩어리를 흙 가마에 올려놓고 그 위에 솥을 거꾸로 엎어 태우면 증기가 솥에 닿아 응고되는데 이것을 비상이라고 한다.

비소 증기에 노출된 초목은 말라죽고 2년 이상 비상을 만드는 사람은 수염이나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비상을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중추신경이 마비돼 1~2시간 안에 숨진다. 수은을 섞으면 독성이 배가된다.

비상으로 숨진 시신은 하루 정도 지나면 온몸에 작은 포진이 생기고 몸 전체가 청흑색으로 변한다.

눈동자와 혀가 나오고 입술이 찢어지며 두 귀와 복부가 붓고 항문은 벌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사약을 마시고 대부분 체온이 올랐다는 점에서 뿌리 독성이 강한 ‘부자’ 약재를 넣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한의사도 있다.

투구꽃 덩이줄기 뿌리인 부자는 중독되면 입과 혀가 굳어지고, 두통, 현기증, 귀울림, 복통, 구토 등 증상이 나타난다.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이 소리에 한을 더하려고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부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사약을 마신 죄인이 곧바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데 실제로는 최소 30분 이상 지나야 숨을 거두고 토혈은 거의 없었다.

사극에서는 콜라나 한약, 간장 등을 적절하게 섞어서 사약인 것처럼 해서 마신다고 한다.

사약 집행은 죄인 자택이나 유배지 등에서 가족과 의금부 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진다.

일단 사약을 마시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방문에 못을 박은 다음 군불을 강하게 지펴 실내 온도를 최대한 높인다. 약발이 빠르게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약 반응이 사람마다 달라서 소량만 들어가도 목숨을 잃는가 하면 여러 사발을 마시고도 멀쩡한 사례가 간혹 생긴다.

이런 돌발 사태에 대비해서 사약을 넉넉히 챙긴다.

교통이 불편한 먼 유배지에서 준비해간 사약을 전부 마시고도 죽지 않으면 다음 사약이 내려올 때까지 며칠 동안 기다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왕이 하사한 사약을 제삼자가 건드리면 극형에 처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경종이 1722년 좌의정 출신 조태채에게 보낸 사약을 홍동석이라는 머슴이 뒤엎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조태채는 귀양지 진도에서 죽기 전에 육지에 나간 아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금부도사에게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별안간 홍동석이 나서서 사약 항아리를 깨트린 것이다.

금부도사는 진상이 알려지면 본인도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험한 파도로 배가 심하게 요동쳐 사약을 물에 빠트렸다고 왕에게 허위 보고를 하고서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끝내 사약을 견디면 살려주지는 않고 자결을 유도하거나 군졸이 화살 시위를 풀어서 목 졸라 죽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성리학 대가로 노론 영수를 지낸 송시열(1607~1689년)이 석 잔을 연거푸 마신 다음에야 죽음을 맞았다.

평소 건강 관리를 위해 수시로 마신 어린애 오줌 성분이 사약 독을 없애는 바람에 약발이 더디게 받았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사약을 가장 많이 마신 인물은 부제학(정3품 왕실 비서관)을 지낸 임형수(1514~1547년)다.

왕의 외척과 실세들이 벌인 권력다툼에 희생된 임형수는 죽는 순간까지 의연한 기품을 유지한 일화로 유명하다.

임형수는 양재역 벽서사건 누명으로 처형된다.

벽서사건은 "여자가 권력을 잡고 간신이 농간을 부리니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익명의 글이 양재역에 적힌 사건이다.



여기서 지목된 여자는 문정왕후(1501~1565년)로 조선왕조 여성 가운데 수렴청정 등으로 최고 권력을 누린 인물이다.

미국으로 반출됐다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전용기편으로 최근 돌아온 '문정왕후어보'의 주인이기도 하다.

문무에 능하고 성격이 호방한 임형수는 퇴계 이황과 수시로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조리며 조선 장래를 토론했다.

두주불사형인 임형수는 고향인 전남 나주에서 사약을 탄 독주를 16잔 비우고도 아무런 이상 징후를 못 느껴 민가에서 갖고 온 독주 2잔을 더 마셨다고 한다.

독주를 마실 때 온 가족이 대성통곡을 하는 상황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임형수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할 상대가 없구나"라고 한탄하자 갑자기 시종이 안주를 들고나온 것이다.

이에 임형수는 "벌주에도 안주를 금지하는 데 하물며 이 술이 어떤 술이라고 안주를 먹겠느냐"며 물리쳤다고 한다.

18잔에도 사약 효력이 없자 교형을 집행한다.

이때 임형수는 목을 졸랐을 때 혀를 길게 내밀고 죽는 게 수치스럽다며 모든 사람이 방 밖으로 나가달라고 주문한다.

결국, 집 벽에 구멍을 뚫어 연결한 밧줄을 임형수 목에 걸고서 방 밖에서 군졸 2~3명이 힘껏 잡아당겼다.

일정 시간이 지나 '쿵' 하는 소리가 들리자 숨진 것으로 판단한 금부도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가 대경실색한다.

밧줄에 걸려 넘어진 것은 임형수가 아니라 잠잘 때 쓰는 목침이었기 때문이다.

금부도사 일행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본 임형수는 방구석에 누워서 호탕하게 웃으면서 "평생 즐긴 해학을 마지막으로 해 봤다"고 말하고서 밧줄을 목에 걸어 죽임을 당한다.

고위 관리나 왕족이라고 해서 모두 사약을 받은 것은 아니다.

좌의정 이건명(1633~1722년)은 지관이던 목호룡의 모함을 받아 유배지 전남 고흥군 나로도에서 참형으로 죽었다.

목호룡도 모략이 들통나 서울 용산구 신계동 당고개에서 목이 잘려 사흘간 길거리에 매달려 전시됐다.



죽음 앞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예의를 갖춰 사약을 받는 형벌은 다른 나라에서 매우 드물다.

선비를 죽일 수 있어도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사가살(士可殺) 불가욕(不可辱)' 가르침을 반영한 사형제다.

선비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것을 최고 덕목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김 전 실장이 조선 시대라면 사약을 받을 자격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투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지시 혐의와 별개로 1964년 검사 임용 이후 50여 년 간 남긴 행적이 선비와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에 앞장서기는커녕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관권선거를 부추긴 것을 비롯해 정권 교체기마다 화려한 변신을 거듭함으로써 권력 핵심부에 줄곧 머물렀다.

지조를 지키느라 가시밭길을 걸은 선비에게 사약이 어울릴 뿐 꽃길만 밟고 살아온 김 전 실장은 법원 심판을 기다리는 게 순리다.

hadi@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