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트레일러 기사를 과속·졸음운전으로 내모나
"선사·터미널 횡포에 시간 허비, 잠 줄이고 과속할 수밖에"
"고속도로 통행료 심야 할인제도·주차장 부족도 요인"
(부산=연합뉴스) 이영희 기자 = "매일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졸음운전의 끝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라는 경고 문구를 수십 번씩 보지만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처진다."
컨테이너를 수송하는 트레일러 기사 황모(43) 씨는 30일 "운전 중에 조는 바람에 차체가 가드레일을 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다행히 아직 큰 사고를 내지는 않았지만 늘 불안하다"고 말했다.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는 트레일러 관련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은 과속이나 졸음운전이다.
기사들은 낮은 운임, 선사와 터미널 운영사 등의 갑질 횡포가 자신들을 과속과 졸음운전으로 내몬다고 주장한다.
천모 씨는 "우리나라 물류 먹이사슬의 가장 바닥에 있는 기사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보니 잠이 부족한 채로 운전대를 잡고 과속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화주-대기업 물류회사-대형 운송사-중소 운송사를 거치면서 단계마다 수수료를 챙기는 구조이다 보니 기사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기 어렵다.
중소 운송업체 간부 A씨는 각종 물가가 올랐지만 운임은 몇 년 전보다 되레 떨어지거나 제자리걸음을 해 기사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을 모으기는커녕 먹고살기에도 급급한 처지에 있다고 말했다.
운송사에 고용된 기사는 임금의 70% 정도는 고정급으로 나머지는 실적급으로 받는다. 자기 차를 운송사에 지입하는 형태로 일하는 기사들은 매월 몇십만원의 지입료를 내야 한다.
한 번이라도 더 운행해야 수입을 늘릴 수 있어 기사들에게는 시간이 돈인 셈이다.
하지만 선사와 컨테이너 터미널의 횡포 때문에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선사가 컨테이너 내부 청소와 위험물 스티커 제거 등을 떠넘기는 바람에 기사들은 화주에게 가져다주기 전에 직접 쓸고 닦고 페인트를 칠하고 망치로 펴야 한다.
몇 시간을 달려 싣고간 컨테이너를 화주가 거부하면 기름값과 고속도로 통행료 등 비용은 물론 하루 수입 대부분을 날리기 때문에 어지간한 문제는 직접 해결한다.
상태가 나쁜 컨테이너를 배정받으면 이를 다른 것으로 교환하느라고 터미널 안에서 최소 1시간이 걸린다. 연이어 상태 나쁜 컨테이너가 걸리면 3~5시간씩 발이 묶이기도 한다.
터미널 운영사들이 장비투자를 외면해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기까지 1~2시간씩 대기하는 일도 일상처럼 돼 있다.
기사 박모 씨는 "이렇게 날려버린 몇 시간을 만회하려면 잠을 줄이고 과속할 수밖에 없다"며 "기사들 대부분이 목숨 걸고 운전대를 잡는다"고 말했다.
그는 "장거리를 운행하는 기사들은 대다수가 일주일에 한 번도 집에 가지 못하고 차 안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한다"며 "늘 수면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사들은 고속도로 통행료 심야시간 할인제도 역시 과속과 밤샘 졸음운전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10t 미만 화물차에만 적용하던 고속도로 통행료 심야할인 제도를 지난해 7월부터 트레일러로 확대했다.
할인시간대는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다.
한 요금소에 진입해 다른 요금소를 빠져나갈 때까지 운행한 전체 시간 대비 할인대상 시간의 비율에 따라 최대 50% 통행료를 깎아준다.
장거리를 오가는 기사들은 대부분 도로비를 아끼려고 야간 운행에 나선다.
터미널에서 시간을 빼앗긴 데다 도로비 할인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중간에 쉴 엄두를 못 내며 졸음 쉼터 등지에서 잠깐 쪽잠이라도 자면 다행이라고 기사들은 전했다.
잠 못 자고 밤새 달려 다음날 오전 화주에게 컨테이너를 실어다 준 기사들은 오후 6시 전에 끝나는 부산신항의 빈 컨테이너 반납시간 전에 돌아오려고 또다시 가속페달을 밟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사들은 "정부가 이런 기사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통행료 할인시간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 부족도 졸음운전을 부르는 요인이라고 기사들은 지적했다.
부산신항에서 경인지역을 오가는 기사들은 밤 10시 30분 이후 상행선은 선산휴게소, 하행선은 성주주차장을 지난 뒤부터는 주차할 곳이 없어 졸음을 참으며 운전할 수밖에 없다며 화물차 기사들을 위한 대규모 주차장을 마련해 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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