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판사회의 상설화' 수용…풀뿌리 사법개혁 시작됐다(종합)
판사 인사 등 제도개선 전반 문호 개방·법원행정처 기능 재검토
물의 판사 징계 약속·'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 요구엔 "교각살우"
논의 주도권 쥔 판사회의, 일각에선 '판사노조' 될까 우려도
(서울=연합뉴스) 방현덕 기자 = 양승태 대법원장이 '전국법관대표회의'(판사회의)가 요구한 판사회의 상설화 방안을 전격 수용했다. 9월 퇴임을 앞두고 일선 판사들의 거듭된 사법개혁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전국 단위의 상설 판사회의체가 생기는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판사들이 인사 등 사법행정에 목소리를 낼 통로가 생기면서 대법원장의 권한은 대폭 분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아래로부터의 선제적 개혁'은 국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개헌 논의와 함께 사법부의 지형을 크게 바꿔놓을 전망이다.
양 대법원장은 28일 법원 내부망 '코트넷'을 통해 "향후 사법행정 전반에 대해 법관들의 의사가 충실히 수렴·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상설화하는 결의를 적극 수용해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양 대법원장은 이를 위해 현재 대법원장의 행정 권한을 수행하는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구성·기능을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또 판사회의 측에 승진·근무평정·연임제도·사무분담 등을 포함한 각종 제도개선을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사태는 법원행정처 고위간부가 대법원장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법원 내 학술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세미나를 연기·축소하기 위해 올해 초 연구회 소속 판사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으로 촉발됐다.
이후 행정처가 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성향을 파악한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행정처 컴퓨터에 저장해놨다는 추가 의혹이 제기되면서 일선 판사들이 8년 만에 전국 단위 판사회의체를 조직해 나서는 등 파동이 일었다.
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이끈 이인복 전 대법관은 이규진(55·사법연수원 18기)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고법 부장판사)이 부당지시를 내린 장본인이며 '블랙리스트'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결론 내렸고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는 이 전 상임위원에 대한 징계를 권고했다.
양 대법원장은 이날 윤리위의 권고대로 책임자 문책 등 후속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판사회의 측이 19일 첫 회의 끝에 양 대법원장에게 요구한 '사법부 블랙리스트' 등에 대한 추가조사 권한 위임은 "교각살우"라면서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이제껏 각종 비위 혐의나 위법사실 등 어떤 잘못이 드러난 경우에도 법관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그의 동의 없이 조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이는)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선을 그었다.
판사회의 측은 같은 날 '상설화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서경환(51·21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선출했다. 상설화되는 판사회의는 국회처럼 사법부 내 대의기구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일선 판사들의 최대 불만인 인사 제도를 고치는 데 큰 목소리를 낼 거란 분석이 많다.
다만, 판사회의가 이번처럼 사실상 대법원장을 압도하는 힘을 얻는 데 대한 경계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법원 안팎에선 회의를 주도하는 판사 상당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란 지적과 함께 회의가 실질적으로 '판사노조'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연구회 자체는 400여명의 다양한 판사들이 속해 있지만 흐름을 주도하는 판사들은 과거 '우리법연구회' 성격의 강경·진보 성향 판사들로 평가되기도 한다.
판사회의가 인사·복지 전반에 대해 일선 판사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통로로서 기능하는 점은 환영하지만, 인사나 사법행정 등에 과도한 의견을 내거나 집단 움직임에 나설 경우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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