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는 직지를 알고 있었을까…영화 '직지코드'
우광훈 감독 "팩트에 기반한 박진감 넘치는 다큐멘터리"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이다. 1455년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섰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고 박병선 박사가 1972년 서고에서 직지를 발견하면서 최고(最古) 기록을 바꿔 썼다.
28일 개봉하는 영화 '직지코드'는 이런 상식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고려 인쇄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보태고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을 기록한 추적 다큐멘터리다.
캐나다인 영화감독 데이빗 레드먼과 심리학·국제언론정보학 대학원생인 명사랑 아녜스가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위스 등 5개국 박물관과 도서관을 뒤지고 연구자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일단 직지를 눈으로 확인하려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찾지만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다. 보존상의 문제가 있다며 직접 열람을 허용하지 않는 도서관측 관계자들을 카메라는 의심 섞인 눈길로 비춘다.
고려인이 유럽으로 건너간 공식 기록은 없다. 반대는 어떨까. 제작진은 당시 원나라와 고려가 사돈을 맺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에 착안해 원나라를 오간 교황청 사제의 기록을 찾아본다.
하지만 인쇄술이 전해졌다는 뚜렷한 근거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카메라와 하드디스크를 몽땅 도난당하는 사고까지 겪는다.
소득이라면 오히려 구텐베르크를 둘러싼 신화를 한 꺼풀 벗겨낸 데 있다. 제작진이 유럽의 거리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구텐베르크가 금속인쇄술을 처음 발명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인쇄했다거나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법정공방 과정에서 제출된 문서에 '구텐베르크는 책에 관한 일에 돈을 썼다고 말했다'고 돼 있지만 '책에 관한 일'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직지가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빨랐을 뿐 아니라, 구텐베르크가 직지를 베꼈을 가능성이 있다는 애초의 전제는 다소 무모하고 위험하게도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어느새 동서문명 교류사로 시야를 넓힌다. 한편으로, 우리는 왜 직지가 가장 오래된 금속인쇄본이라는 데만 관심을 갖고 그 내용과 가르침에는 무지한지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또다른 성과는 바티칸 비밀수장고에서 발견했다는 교황의 편지 필사본이다. 이 편지는 1333년 교황 요한 22세가 니콜라우스 신부를 캄발리크(현재의 중국 베이징) 대주교로 임명하며 들려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에는 '고려왕이 우리가 보낸 그리스도인들을 환대해줘서 기쁘다'는 구절이 적혀있다. 교황청과 고려 사이에 인적 교류가 있었다면 1594년 임진왜란 때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록한 역사도 다시 써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편지가 애초의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무리하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서문명 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 정도로만 본다.
우광훈 감독은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직지가 우수하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을 배제하고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다. 팩트에 기반해,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설을 추적하는 박진감 넘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직지의 고향'인 청주 출신으로 직지축제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정지영 감독이 제작을 총지휘했다.
정 감독은 "전제에 대한 단서를 찾지는 못했지만 교황이 고려에 사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면서 "교황청과 고려는 틀림없이 교류하고 있었을 것이고 금속활자가 전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작업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2세가 실제로 고려왕에게 편지를 보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난해 제작진이 편지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지만 부정적 견해가 우세했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편지 사본을 해석해본 결과 문법 체계와 당시 동아시아의 지리적 환경을 볼 때 고려의 왕에게 보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내용의 논문을 학술지 '교회사학'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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