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거인' 콜, 통독·냉전해체·유럽통합 주역
현대사 산증인, 통일 견인하고 유럽 통합 이끌어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안데르센 동화집의 저자를 깜빡 잊었다.'
이 능청스럽고도 황당하게 들리는 유머의 주인공은 헬무트 콜이다. 코끼리 같은 풍채와 육중한 카리스마가 특징인 그가 16일(현지시간) 87세를 일기로 세상과 이별했다.
말도 안 되는 유머로 헛웃음을 흘리게 하는 이 주연 정치인은 통일독일을 상징하는 역사적 정치인이자 중도우파 기독민주당의 큰 기둥 같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독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우뚝하고도 뾰족하다. 1990년 독일 통일은 같은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의 서방정책과 라이벌 중도좌파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에 빚진 바 크지만, 콜의 본능적 통찰과 신속한 판단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성취였다. 단연 그에게 '통일총리'라는 영예스런 별칭이 안겨진 이유다.
1982년 총리에 오를 때부터 행운은 따랐다. 총선 없이 사민당과 이별한 자유민주당에 손을 내밀어 잡고 독일 특유의 '건설적 불신임' 제도의 첫 적용 케이스로 총리에 올랐다. 현직 총리를 교체하려면 후임 총리가 분데스탁(연방하원) 원내 투표로 뽑혀야 한다는 제도가 건설적 불신임인데, 바로 역대 첫 적용 성공 케이스로 그가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후임에 선출된 것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콜 총리 집권 초반의 장면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1,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이들을 더불어 추념하며 독불(獨佛)의 화해열차를 초고속 레일 위에 올려놓은 '사건'이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 양국은 쌍두마차가 되어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 등 유럽의 프로젝트를 이끌며 유럽연합(EU)의 질서를 주도했다.
편입학한 하이델베르크대학을 마치고 역사와 정치를 전공한 그는 갈수록 덩치가 산(山)만해졌지만, 정치적 기민함에서만큼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표현이 걸맞은 정치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세계사의 기적으로도 평가되는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닥친 소위 통일 정국에서 그의 정치적 감각은 빛을 발했다. 라이벌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이 점진통일론으로 주저하는 동안, 그는 조기통일론의 논리를 세우고 처음에도 마음속에 두었다가 이후 밖으로 꺼내어 전광석화처럼 밀어 붙었다.
동, 서독 분단 극복을 10개항 발표, 동·서독 통합을 위한 통화경제사회조약, 동·서독과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간 4+2 주변국 설득 통일외교, 1대 1 화폐 통합 등은 이후 여러 논란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콜의 정치력과 자민당의 한스-디트리히 겐셔(작년 별세) 당시 외교장관의 노련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나, 1990년 3월 동독에서 처음 치러진 자유선거는 그에게 결과적으로 통일총리의 타이틀을 안기게 되는 결정타였다. 평화공존과 점진통일을 내세운 사민당보다 조기통일과 화폐통합같은 급격한 노선을 내세운 기민당 주도의 '독일을 위한 동맹' 정파가 압승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 동방정책 '병풍'을 배경으로 하여 구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정책이 소련 그 자체와 동유럽 공산정권들의 대변화를 일으키는 동안 있었던 1987년 서독에서의 구동독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과의 만남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슈피겔온라인은 이날 그런 콜의 작고를 전하는 기사에서 '검은 거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검은색은 기민당의 상징색이다.
그랬던 고인이지만, 그의 정치적 후퇴 과정과 정계 은퇴 이후 말년 생활은 어두컴컴한 편이었다.
자신의 주도한 통일 이후 독일에 닥친 통일 부담과 경제 악화로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1998년 정권을 내줘야 했다.
이후 기민당의 정치 비자금 추문에 휘말려 명예총재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2002년 공식적으로 정계를 떠난 뒤 건강 악화와 가족 불화설에 시달렸다.
우울증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으로 첫 부인 한넬로레를 잃고 나서 2008년 자신의 옛 총리실 비서였던 35세 연하의 마이케 리히터와 재혼했고, 이 마이케가 정상적인 생활이 힘겨운 콜의 일상사를 관리, 통제했다는 논란도 자주 일었다.
마이케가 콜의 자서전 저작권 분쟁 같은 굵직한 경제 문제와 콜의 언론 인터뷰 등 대다수 대외활동 문제를 정리하고 나서자, 그의 두 아들 발터와 페터는 상당한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까지도 자서전 저술을 위한 대필 작가의 녹취 테이프와, 허락 없는 자서전 출판을 두고 법적 다툼을 벌이는 것이 더러 뉴스에 등장한다.
콜을 떠올릴 때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의 관계는 빠질 수 없는 소재다. 구동독 물리학자 출신의 정치 풋내기 메르켈의 존재를 한 기자의 소개로 알게 되어 통독 초대 내각의 여성장관으로 발탁한 데 이어 환경장관으로 기용했다.
그렇지만, 메르켈은 1999년 말 정치자금으로 비틀거리던 콜을 겨냥해 한 일간지 기고에서 '기민당은 콜 없는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며 일격을 가하고 결별한다. 콜의 양녀라는 별칭도 따랐던 메르켈이 당내 온정주의를 버리고 민심을 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둘의 감정은 크게 상했지만, 이후 서로 앙금을 거두어 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근년 들어서는 메르켈이 콜을 기민당의 거물로 상찬하는 등 거리를 좁히려는 자세도 보였다.
우리나라 정치인과의 인연도 몇몇 있다. 그 중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이 많이 알려진 편이다. YS가 야당 지도자였던 5공 말기 때 기민당 계열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이 서베를린 방문을 요청했다. 특히 YS가 당선되고 나서 1993년 3월 콜은 한국을 방문했고, 꼭 2년 뒤인 1995년 3월 YS가 독일을 찾았다.
둘은 10∼20대 등 젊은 시절부터 정당 가입 등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세련되고 치밀한 논리보다는 감각적 결단과 추진력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고, 나아가 시중 유머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에도 빼닮았다.
uni@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