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짧은 소설에 불꽃 튀는 듯 짜릿한 무언가 담아"

입력 2017-06-15 08:40
수정 2017-06-15 08:56
성석제 "짧은 소설에 불꽃 튀는 듯 짜릿한 무언가 담아"

짧은 소설 55편 엮은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성석제(57)가 새 소설집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문학동네)을 냈다. 실린 작품이 무려 55편. 크게 장편과 중·단편으로 나뉘는 한국문단의 소설 양식에서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짧은 소설'들이다.

초단편, 나뭇잎이나 손바닥에 빗대 엽편(葉篇)·장편(掌篇)으로도 불리는 짧은 소설은 원고지 20매를 좀처럼 넘지 않는다. 이기호·조경란·김솔·안영실 등이 지난해부터 잇따라 초단편 소설집을 선보였다.

돌이켜보면 성석제는 이런 트렌드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시로 등단한 성석제가 소설가로 본격 전향한 건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다. 산문시와 수필과 소설의 교집합처럼 읽히는 62편의 초단편을 묶은 소설집이었다. 풍자와 해학, 익살과 능청이 주무기인 작가에게 짧은 소설은 맞춤으로도 보인다.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은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2007)과 '인간적이다'(2010)의 원고 일부에 새로 쓴 작품들을 보탠 것이다. 작가는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와 역시 짧은 소설집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2003) 개정판을 함께 냈다.

세 권의 책은 작가가 2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런 작품들을 써왔다고 말해준다. 인물들은 달변에 용의주도한 듯 보이지만, 어딘가 어수룩한 구석이 있다. 웃음은 대개 거기서 나온다. 예전에 쓴 작품들이 독자를 웃느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면, 최근작일수록 웃음의 폭발력은 잦아들고 여운은 길게 남는다.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작품도 여럿이다.





-- 책 세 권을 한꺼번에 냈다. 짧은 소설의 원조라고 말하는 것인가.

▲ 실례되는 말씀이다. 프랑스의 알퐁스 도데를 비롯해 유럽과 영미 쪽은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다. 중국의 루쉰도 마찬가지다. 주로 한문으로 썼지만 우리나라에도 그런 작가들이 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이나 '예덕선생전'은 그야말로 '노가리'에 가까운 짧은 소설이다. 전기를 보면 박지원이 소설을 쓴다고 소문이 나자 종잇값이 올랐다고 한다. 원고료는 못 받았다고 한다.

-- 짧은 소설의 매력은.

▲ 불꽃이 튀는 듯한, 짜릿한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 번역도 쉽고 장르를 넘나들기도 쉽다. 장르가 세분화하기 이전 우리 마음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은 사실 장르가 분리되기 이전과 별로 다르지 않나. 오히려 완전성을 담을 수 있다. 통상적인 소설의 구조와는 달리 자유롭고 창의력이 충만한 장르다. 실험정신이 왕성한 작가들이라면 써보고 싶어하는 분야다. 문제는 수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문예지나 소설을 게재하는 매체들은 단편 이상의 분량을 필요로 한다. 수요가 없는데 프로가 아무데나 막 써댈 수도 없고, 원고료는 받아야 먹고 살 것 아닌가. 나는 초기에 신대륙으로 떠나서 그런지 짧은 소설에 대한 청탁이 계속 있었다. 한 달에 한 편 정도는 꾸준히 써온 것 같다. 벼락이 떨어지면 전류를 붙잡아 축전지에 집어넣고 쓰듯 한 때가 있다. 느긋하게 걸어 다니면서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의 본질이 뭔지 생각하며 쓸 때도 있다.

-- 문단이라는 제도와 무관하지 않은 얘기다.

▲ 1980년대 잡지 전성시대에는 사보 같은 데서 많이들 청탁을 받았다. 분량은 원고지 15∼20매에 반전 같은 게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때는 너무 뻔해서 관심이 없었다. 뭔가 다른 표현 방법으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게 1990년대다. 시가 안 되는 불순하고 덩어리진 재밌는 이야기들,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을 찾아봤다. 처음에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출판사 영업부 직원이 이런 것도 소설이라는 깨달음을 줬다. 책을 낼 때가 됐는데 장르를 못 정하고 있었다. 영업부 직원이 소설이라고 하면 잘 팔릴 거라고 했다. 그 책이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다. 그분은 아주 잘 되셨을 거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하던 혼란기였는데, 지금은 더 쓸 게 많아진 것 같다.

-- 소설이 짧다 보니 서너 쪽에 한 번씩 웃겨야 하는데, 더 어렵지 않나.

▲ 그건 개그나 예능이다. 소설은 독자와 작가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교감하는 것이다. 웃기고 즐겁고 재밌게 하는 것 이상으로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휘발해서 날아가 버리는 일시적 웃음보다는 귀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감정을 나눌 수 있게 하면 문학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 최근작일수록 여운이 길고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 시기적으로 제 자신이 달라졌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재밌는 것이었다. 재밌다는 건 웃기는 것도 있고 울리는 것도 있다. 그걸 담으려고 애를 쓰는데 대개 웃기고 가볍고, 툭 치고 지나가는 잽 같은 걸 독자들이 읽는다. 생각이 느려지고 걸음이 느려지면서 좀 바뀐 것 같다. 더 재밌는 걸 포괄하는 넓고 깊은 매질 같은 게 없나, 그런 식으로 천천히 쓰다 보니 방향이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달라지지 않으면 괴물 아닌가.

--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지 20년 정도 됐다. 자랑인가 부담인가.

▲ 꾼이라는 게 나무꾼이나 농사꾼처럼 노동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다. 비칭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노동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좋다. 처음에는 좀 넘치는 말이라 거북했다. 자꾸 듣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다. '안 이야기꾼' 이러면 섭섭할 것 같다. 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칭호다.

-- 마지막으로 시를 쓴 게 언제인가.

▲ 1995년 여름이다. 시 청탁이 왔길래 너무 반갑다고 했더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쓰라더라. 쓰고 보니 시가 아니었다. 몇 달 사이 체질이 바뀌었던 거다. 제목이 뭐였더라.

-- 체질이 달라졌으면 앞으로도 시 쓸 일은 없겠다.

▲ 지금도 주변에서 농담처럼 얘기하는데, 소름 끼친다. 악몽을 꾸는 것 같다. 처음에 친구들이 전부 시를 쓰고 있어서 왕따 될까 봐 억지로 시험공부하듯 썼다. 등단하고 시집을 내면서도 시가 되지 않는, 전류량이 많이 남은 언어의 덩어리들이 있었다. 그걸 손봐서 책으로 냈다. '시가 안 되니까 소설 쓰는구나' 생각해줘서 소설 청탁이 들어오고 오늘날까지 왔다.

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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