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인생플랜]③ 울타리 밖 세상이 더 넓었다
공군장교→공무원→요리사 변신 주신호씨 자격증만 13개
"도전, 변화, 취미는 인생의 여정을 즐길 세월 탑승권"
(무안=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 바야흐로 셰프 전성시대.
이달 14일 오전 전남 무안군 남악 요리 아카데미에서는 조리사가 되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의 꿈이 영글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이마에 맺힌 땀을 밀가루 묻은 손 대신 어깨로 훔쳐가며 양푼에 담긴 반죽을 주물러댔다. 발효기에서 나온 반죽은 잔뜩 부풀어있다.
수강생들은 250g 크기로 5등분한 반죽에 비스킷 등 토핑용 재료를 올려 오븐으로 구웠다.
3시간 넘게 모카 빵을 만드는 동안 원장 주신호(64)씨는 '매의 눈'을 가동했다. 물과 밀가루 양 조절에서 반죽 계측을 거쳐 익힘 과정까지 진땀을 흘리며 빵을 만드는 수강생들을 주시했다.
느릿하게 실습대 주변을 돌면서도 "달걀을 지금 넣으면 안된다", "물이 너무 많다"는 등 조언을 잊지 않았다.
흰 가운을 입었다뿐이지 요리 강사보다는 교장 선생님에 가까운 풍모였다.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일반인과 학생은 물론 학업을 포기한 '학교 밖 아이들', 다문화 가정 학생들도 그의 수제자들이다.
2012년 전남도에서 지방이사관으로 명예퇴직한 주씨는 요리 강습의 흥미를 반감시킬까 봐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자제한다고 했다.
하지만 공직자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것 같았다. 자식 같은 강습생들에게 "조리사는 심성이 고와야 한다"고 훈시할 때는 더 그랬다.
그는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 조리사 자격증 외 평생 교육사, 청소년 지도사 등 관련 분야 자격증도 땄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기자에게 내놓은 카페라테에는 꽃무늬가 둥둥 떠 있었다.
"잔 한쪽으로만 커피를 마시면 무늬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끝까지 마실 수 있다"는 주씨의 말을 따랐다.
꽃무늬와 함께 부드럽게 넘어가는 커피를 음미한 뒤 그와 인생이모작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남도와 시·군의 주요 보직을 거친 공무원이 요리를 인생의 두 번째 천직으로 삼게 되기까지는 '필요'가 '필연'으로 바뀌는 과정이 있었다.
주씨는 퇴직 후 노인복지 법인에서 인문학 강좌, 단체 급식 등을 도왔다. 그곳에서 식료품 배달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않는 업체의 늑장으로 생기는 현장의 어려움을 겪었다.
음식을 직접 조달하는 방안을 궁리하던 주씨에게는 조리사 자격증이 필요했다.
한식, 일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차례로 정복했다. 요리의 매력에 빠져 제과·제빵·바리스타까지 음식 관련 자격증이 13개나 된다.
전문대학에서 커피 바리스타와 외식 조리학도 배웠다.
주씨는 "요리는 과학적 창조물이자 풍미 있는 예술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다"며 "요리를 하면서 삶에 대한 자신감과 안정감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그윽한 향과 맛을 담은 카푸치노 한 잔에 직접 만든 빵 한 조각을 곁들여 지인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요즘 그의 즐거움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와인도 빠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소믈리에 자격증도 있다.
퇴직 후 변신에 성공한 주씨는 공직 입문 전에도 한차례 도전을 경험했다.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해인 1976년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망가진 몸으로 군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가 밀려왔다.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를 이상으로 삼았던 그는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 사관학교 출신 사무관 특채에 응시해 1982년 행정 공무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건강을 회복하려고 시작한 마라톤에도 심취했다. 마라톤 대회에서 지역을 홍보해 '달리는 홍보판'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함평 부군수 시절 나비 축제를 홍보하려고 전국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가 다른 지역 동호인으로부터 함평 마라톤 대회 참가 약속을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한 일화도 있다.
지금은 2천100여 차례에 걸쳐 3만400㎞를 주파한 경력의 어엿한 마라토너다. 공직자 칼럼 등 책을 내고 동료 공무원 상대로 강연활동도 활발히 했다.
이런 경험을 자양분으로 퇴직 후 처음 한 일이 노인 대상 문화대학 개설이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공직 생활을 했지만, 울타리 밖으로 나와보니 그동안 몰랐던 더 넓은 세상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생활요리를 배우러 학원에 오는 공직 후배들에게 "100세 시대에 퇴직 후 우두커니 삶을 소비하지 말고 스스로 인생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주씨는 "아직 젊은 후배들은 그 말이 피부에 와 닿아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자신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고, 잘한다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일을 찾는다면 설사 그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소소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일상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잘못 하면(?) 퇴직하고도 50년을 더 살지 모른다"며 웃었다. 그러고는 인생이모작 성공 비결을 귀띔해 줬다.
"도전, 변화, 취미야말로 인생의 여정을 즐기게 하는 '세월 탑승권'입니다."
sangwon700@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