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A씨, 사과해!"…대학가 性사건 자체 폭로 잇따라

입력 2017-06-14 09:16
"가해자 A씨, 사과해!"…대학가 性사건 자체 폭로 잇따라

신고 대신 대자보로 공론화…"가해자 포함 전체 집단에 경종 효과"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대학생 사이에 일어난 성(性) 추문 사건을 경찰이나 학교에 신고하지 않고 대자보로 폭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추행을 당해도 피해를 숨겨야 했던 여성들이 이제는 단지 가해자뿐 아니라 해당 집단 전체 구조에 경종을 울리려 하는 것"이라며 주목하고 있다.

14일 고려대학교에 따르면 고대 학내 게시판에는 최근 이틀 연속으로 성추행 사건을 폭로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먼저 12일 한 학과 게시판에 '성추행 가해 남학생이 자신의 잘못을 여자친구에게 감추기 위해 피해 여학생에게 잘못을 덮어씌웠다'는 내용이 게시됐다.

대자보에 따르면 남학생 A씨는 지난해 8월 말 여학생 B씨와 술을 마시고는 먼저 집에 간 B씨 집에 찾아가서 강제로 입맞춤을 시도했다.

B씨는 고민 끝에 다른 친구와 함께 이 사실을 A씨의 여자친구에게 알렸는데, 여자친구가 해명을 요구하자 A씨는 'B가 먼저 유혹했다'는 취지로 거짓말했다.

해당 학과 성평등대책위는 "이 사건 관련 유언비어가 심하다고 판단해 공론화한다"면서 "피해자는 학생회가 A씨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13일 고대 다른 학과 게시판에는 '평소 여학우 얼굴·몸매 평가를 일삼던 남학생 두 명이 한 여학생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고 항의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두 남학생이 여학생들 사이에 평판이 나빠지자 한 여학생 탓으로 몰며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해당 학과 여학생 일동은 "두 남학생은 여론몰이를 중단하고 사과문을 게시하라"면서 "학교는 이들을 제명하라"고 요구했다.



두 사건 피해자와 각 학과 학생회는 경찰이나 학교·언론에 신고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진상을 규명한 다음 학생 사회에 폭로하는 방법을 택했다.

최근 대학가에서 이 같은 문제 해결 방식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부터 서울 주요 대학에서 연속 폭로된 '남톡방(남자만 있는 카톡방) 여학우 성희롱' 사건들이 대표적이다.

'남톡방'에서 여학우들에 관한 음담패설이 오간다는 사실을 여학생들이 대자보로 폭로한 사태가 작년에만 고려대(6월), 서울대(7월), 연세대(9월) 등에서 이어졌다.

서울대 공과대학 학생회는 올해 3월 발생한 동성 학우 간 성추행 사건을 3개월간 자체 조사해, 이달 초 '진상조사 보고서'로 공개하기도 했다.

이는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들이 남몰래 경찰에 신고하거나 언론에 익명으로 제보하던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다.

피해자나 제3자의 신고·진정이나 고소·고발 등을 통해 '사건화'하는 대신 여성 내지 단체 등의 목소리를 통한 '공론화' 방식으로 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접근법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다만 목적·취지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자력구제' 내지 '여론재판' 방식을 통한 '처벌'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는 시각도 일각에선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대자보가 모두 여성 피해자 개인이 아니라 그를 도우려는 집단에 의해 게시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면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 되는데, 총학이나 다른 여성들과 함께 대자보를 붙여 공론화하면 하나의 작은 사건이 아니라 해당 공동체의 전체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대된다"고 분석했다.

윤김 교수는 "과거엔 여성이 성추행 피해를 겪어도 수치심을 강요당하면서 침묵했지만, 이제는 피해자가 다른 여성이나 집단과 연대해 가해자는 물론 사건을 방관한 이들에게까지 칼날을 겨눠 성폭력 재생산의 고리를 끊는 것"이라고 말했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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