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가치 하락-수출 증대 통설에 의문
英 등 일부 선진국들에는 적용 안 돼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하락할 경우 수출 경쟁력을 개선해 수출을 늘리고, 이것이 국내 생산 증가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일부 선진국들의 경우 이러한 교과서적인 이론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1일 지적했다. 많은 경제전문가와 정부 관리들이 이제 기존의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부품 공급망이 글로벌화하면서 수출 증가에 따른 혜택이 수입 비용 증가로 대부분 상쇄된다는 것이다.
WSJ은 금융위기와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투표 등으로 근래 극심한 정치, 경제적 부침을 겪고 있는 영국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국내외 요인으로 파운드화가 그동안 대폭 하락했지만 기대했던 수출 증대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파운드화 하락으로 20% 이상 가격 경쟁력이 향상됐지만 대신 부품이나 원자재 수입 가격이 그만큼 상승해 실제 혜택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다.
부품 공급망이 전 세계적으로 상호 얽히면서 결국 글로벌화가 통화 가치 하락에 따른 혜택을 상쇄시키고 있다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고 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자동차에서 식품 가공, 목재에 이르기까지 해외로부터 부품이나 원자재를 들여오는 업종의 경우 특히 통화 하락에 따른 수출 증대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스카치 위스키처럼 내용물 대부분을 현지에서 생산하는 경우 파운드화 하락에 따른 수출 증대 효과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992년 영국이 유럽환율시스템(EMS)으로부터 탈퇴하면서 파운드화 가치가 9-12월 사이 11% 하락했으며 이로 인해 수출붐이 일면서 무역적자가 흑자로 반전되는 등 경기회복의 실마리가 됐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로 파운드화가 급락하면서는 기대했던 수출 증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07~2010년 사이 파운드화는 주요국 통화에 대해 약 25%가 하락했으며 이후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12년 당시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은 수출 증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며 영국의 수출이 2020년에 1조 파운드(약 1천5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2016년 말 현재 그 절반을 약간 넘는 5천470억 파운드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 브렉시트 투표 이후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 예로, 생산량의 80%를 수출하는 자동차 업체 애스턴 마틴의 경우 파운드화 하락에 따른 전체 매출은 늘었으나 부품 수입 가격 상승으로 순수익 면에서는 별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영국 내 주요 자동차 부품업체들이 지난 10년간 대거 해외로 이전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통화가치가 수출에 미치는 영향을 놓고 글로벌 경제전문가들은 현재 토론 중이다.
최근 세계은행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선진국들의 경우 환율 변동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파운드화, 2012년 엔화 하락은 무역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기업들이 갈수록 글로벌 공급망에 흡수되는 글로벌화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OECD 회원국들의 경우 1995~2011년 사이 수출 가운데 수입품 비중이 14.9%에서 24.3%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IMF(국제통화기금) 전문가들은 통화가치 하락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아직 유효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체 보고서에서 선진국들에서 통화 가치가 최소한 13% 하락할 경우 향후 5년간 수출이 10% 증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영국의 수출은 3.1% 증가했지만 수입은 4.9%가 증가해 기대했던 무역적자 감소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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