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표절 시인이었네"…일상에서 뽑아낸 진솔한 서정시
이재무 열한 번째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이재무 시인(59)이 열한 번째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천년의시작)를 냈다. 1983년 등단한 시인은 일상의 비애와 거기서 터득한 지혜를 꾸밈없는 언어로 형상화해왔다. 저녁을 먹다가 엎지른 국그릇에서, 목욕탕에 널린 수건에서 삶과 세계의 원리를 추출한다.
"살구꽃 흐드러진 봄날/ 네게 엎지른 감정,/ 울음이 붉게 타는 늦가을/ 나를 엎지른 부끄럼/ 시간을 엎지르며 나는 살아왔네/ 물에 젖었다 마른 갱지처럼/ 부어오른 생활의 얼룩들" ('엎지르다' 부분)
"얼마나 많은 몸뚱어리를 다녀온 면수건인가/ 누군가의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와 등짝과 발바닥을/ 닦았을 면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는다/ (…)/ 면수건처럼 추억이 많은 존재도 없을 것이다/ 면수건처럼 평등을 사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닦고 나면 무참하게 버려지는 것들이/ 함부로 구겨진 채 통에 한가득 쌓여 있다" ('목욕탕 수건' 부분)
빗소리마저 "땅이 비를 빌려 우는 소리"('비 울음')로 들릴 만큼 슬픔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 땅의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시인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구름 공장 직원을 꿈꿔보기도 한다.
"과잉이 없고 독과점 없는 이 공장에서는 정규직 비정규직 구별이 없고 정해진 시간 없이 제 내킬 때 일을 하고 퇴근한다네 눈비 오는 날 구름 낀 날은 휴무이고 평생 고용이 가능해서 해고가 없다네 내 여생은 구름 공장 직원으로 살면서 원 없이 실컷 자연이나 생산할거나" ('구름 공장의 직원이 되어' 부분)
그러나 상상력으로 현실을 뛰어넘기에 앞서 길가의 풀과 나무, 행인들의 몸짓과 표정에서 구체적인 진실을 길어 올리는 게 시인의 주된 작법이다. 시인은 스스로 자연과 인생을 표절해왔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고향을 표절하고 엄니의 슬픔과 아부지의 한숨과 동생의 좌절을 표절했네 바다와 강과 저수지와 갯벌을 표절하고 구름과 눈과 비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과 달을 표절했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부분) 116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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