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한열을 사는 사람]① '엄마에서 투사로' 배은심 여사

입력 2017-06-07 10:00
수정 2017-06-07 10:04
[오늘의 이한열을 사는 사람]① '엄마에서 투사로' 배은심 여사

수차례 거절하다 인터뷰 수락…"한열이를 사람들이 잊으면 안 되니…"

가족 건강이 전부이던 '시골 아낙', 이 열사 죽음계기 민주화투사 30년

"지난 삶에 후회 없어…아무리 초라해도 이한열 엄마 역할 하고 싶었다"

[※ 편집자 주 = 올해는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분노래 거리로 쏟아져나온 국민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끌었고, 이는 우리 민주주의를 한층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6월 민주항쟁이 '넥타이 부대'가 조직돼 회사원까지 도로로 나서는 등 전국민적 민주화운동으로 번진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 사건입니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하루 앞두고서 이 열사는 연세대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고, 이를 지켜본 시민의 분노와 저항을 더욱 가열시켰습니다.

연합뉴스는 이 열사 사건 발생 30주년을 맞아 특집기사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이 열사 주변에 있던 인물 6명의 인터뷰 기사를 송고합니다. 이들에게 당시 상황과 소회, 30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해 들으면서 한 세대가 흐른 현재 이 열사의 죽음이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광주=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저기 큰 방에 전화기가 한 대 있었어. 그땐 핸드폰도 없었으니까. 전화가 울리기에 가서 받았지. '이한열이 어머니예요?'라고 하더라고. 무슨 생각을 할 정신도 없이 서울로 허겁지겁 올라갔지…"

지난달 25일 광주 동구 지산동 자택에서 만난 배은심(77) 여사는 30년 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한열 열사가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직격으로 맞았을 때 배 여사는 이 집에 있었다고 한다.

배 여사는 처음 인터뷰 요청을 하자 "뭣 하러 광주까지 오느냐. 이제 할 말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몇 차례 더 간곡한 요청에 만남을 허락한 배 여사는 인터뷰에 응한 이유부터 설명했다.

"강산이 세 번 변했지만 나는 아직 괴로워. 그런 것을 초월해서 얘기해야 해. 나는 괴로워도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 이한열이를 사람들이 잊으면 안 되니까."

1970년부터 살았다는 단층 짜리 한옥식 주택. 이 열사가 태어난 때가 1966년이니 이 집 마당에서 뛰어놀며 유년기를 보냈을 터이다.

배 여사는 마당이 보이는 마루에서 믹스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말문을 열었다.

"1970년 5월에 이 집에 왔으니 한열이가 3살이나 먹었을 때쯤"이라며 "그때는 바로 옆 고가도로도 없는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이웃집들 다 이사 가버리고 외딴집이 됐어."

주변에 들어서는 번듯한 새집으로 이사하고 싶었지만 "이한열이 못 찾아올까 봐" 주저하다가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살림은 단출했다. 지난해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함께 찍은 사진, 신영복 선생이 써줬다는 '여럿이 함께'·'유월하늘함성' 글씨 액자가 걸린 것이 눈에 띄었다.



여느 해처럼 6월이 다가오면서 그의 일상은 무척 바빠졌다. 지난달 5·18 추모제에 23일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에 다녀온 것은 물론이고 각종 토론회와 행사에 참석하느라 곳곳을 다녔다.

배 여사는 "예전엔 피곤한 걸 몰랐는데 이제 조금씩 (피로가) 온다"며 "서울 가는 것이 걱정이고 가면 또 돌아오는 게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무릎이 특히 아픈데, 무릎 정도는 어디 가서 아프다고도 못한다"고 웃었다.

아들이 쓰러진 지 30년 만에 대통령 탄핵에 이어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배여사는 "내 마음이 편해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좋은 것은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좋은 것일 뿐"이라며 "남들이 좋아하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닌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지난해부터 이어진 탄핵 정국은 그에게 남다르게 다가온 듯했다.

"옛날 같으면 최루탄 몇 방에 다 흩어지지 않았겠어? 최루탄이 없으니까 (촛불 집회가) 문화제가 되고 저러는구나 하는 걸 느끼면서도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전두환이 정권은 국민의 함성을 최루탄으로 원천봉쇄 해버렸거든. 그때도 그렇게 안 했으면 이한열이 안 죽었을 것 아니겠어?"

배 여사는 이어 "누가 이런 말을 들으면 서운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며 "최루탄이 없으니까 다 (죽지 않고) 살면서 뜻이 전달되고 하는 것들이 부럽다"라고 말했다.

"옛날엔 10명만 모여도 최루탄을 던져버렸거든. 그럼 숨어야 하니까 사람들이 온데간데없어. 나도 그렇게 살았어."

건장했던 아들이 갑작스레 쓰러지는 바람에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는 투사가 되기 전 그는 평범한 시골 아낙이었다. 배 여사는 자신을 "오지(奧地)에서 나서 오지로 시집 가 가족들 건강이 최고인 줄 알았던 주부"라고 표현했다.

당시 으레 그랬듯 배 여사도 실제 태어난 다음 해인 1940년에야 출생 신고가 됐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 해방이 돼서 여러 가지로 배고픈 세상에서 소나무 껍질도 벗겨 먹었고, 영판 창피하지만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금은 순천시가 된 전남 승주군에서 태어났다. '진짜 오지', '두메산골'이라는 곡성군 주곡면 출신 남편을 만났다. 딸 셋, 아들 둘을 뒀다. 이 열사가 5남매 중 넷째이자 큰아들이다.

배 여사는 "옛날에야 다들 중매로 만났지. 그때 (내가) 없었으면 이한열이가 없었지. 내가 그게 항시… 내가 없었으면 우리 이한열이가 없었을 텐데. '왜 이한열이를 낳아서…'하는 생각이 들어"라고 말했다.

농협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광주로 온 배 여사는 집안일밖에 몰랐다고 한다. "애들 빨래해주고 밥 해주고, 가족들 건강하면 그게 다였다"고 했다.

서울로 대학을 가 학생운동을 하던 아들에겐 "남자가 안 허면 못 쓰니까, 하더라도 뒤에서 혀라"라고만 당부했다.

"너무 자주 그런 말을 하니까 나중엔 (이 열사가) 성질을 내더라고. '아들을 믿으라'고. 그래서 '믿어야지, 나는 우리 아들 믿응께'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여러 가지로 속았어."

이 열사는 최루탄에 맞을 때 시위 대오의 선두에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당부를 지키지 않은 셈이다.



1987년 이후 배 여사의 행적은 이미 잘 알려졌다. 1998∼1999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장을 맡아 422일에 걸친 국회 앞 천막 농성을 통해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끌어냈다. 민주화 시위·집회가 열리는 곳의 선두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처음 나간 집회를 1987년 7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노동자 집회로 기억했다. 배 여사는 "건강한 내 아들 잃었는데 내가 뭐가 무서웠겠나. 내 아들이 왜 죽었을까를 알아야 했지"라고 회상했다.

아들을 향한 그리움이 그가 집회·시위에 빠지지 않게 하는 동력이 됐다.

"현장에 나가면 그 (이한열) 세대의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도 이제 머리 희끗희끗하고 수염도 났지. 그걸 보면 이한열이도 저 정도 됐겠다 싶어. 그 사람들은 또 날 보면 어머니라고 부르고…"

그가 최근 마음 아프게 떠나보낸 이는 전태일 열사의 모친이자 '노동자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소선 여사다.

배 여사에게 이 여사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동병상련의 기억을 공유하는 동지이자 유가협 활동을 함께한 선배였다. 배 여사에게도 이 여사는 '어머니'로 통했다.

배 여사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좀 외로워. 급할 때는 조언도 많이 해주시던 분이라 여러 가지로 참 생각이 많이 나. 그러니 지금도 이렇게 어머니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지"라고 전했다.

한때 아들이 몸담은 연세대 총학생회가 올해 역대 처음으로 꾸려지지 않았다는 소식엔 외려 기뻐했다.

배 여사는 "맞다. 그래야 한다"며 "옛날같이 살면 쓰것는가. 그때가 우리 학생들이 고생한 것 아닌가. 그때는 학생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은 취업이다 뭐다, 바빠서 그렇지 (학생운동에 뛰어들지 않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배 여사는 이 열사를 의사로 키우고 싶었다는 얘기도 털어놓았다. 그는 "한열이가 서울대 경영대 떨어져서 종로학원에서 재수했는데 고등학교 교장님이 연대를 가라고 권했다고 하대. 나야 다른 학교 보내서 의사를 시키고 싶었지"라고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여느 엄마들처럼 자식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연대가 아니라 전남대를 보냈으면 이한열이가 안 죽었을까? 이한열이 죽고 막내아들도 서울로 대학 보내니까 애 아버지가 '한 번 데였으면 되지 않느냐. 미쳤다'고 하대. 막내도 재수했거든. 그런데 서울 가는 걸 말리려니까 애가 '나도 꿈이 있어요'라고 하더라고."

막내는 국립대 교수가 됐다.

"손자들 대학 가는 것이 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한 배 여사는 "내가 살려고 망월동(민족민주열사묘지)이며 서울이며 다녔구나 싶다. 포기가 되니까. 무엇을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다녔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살아있구나 싶다"고 말했다.

또 "가만히 보면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사실 역사가 더럽고 잔인한 부분이 많지 않으냐"며 "사람이 망치고, 또 사람이 만들고 하면서 역사가 흘러가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아들을 잃고서 투사로 살아온 삶에 "후회가 없다"고 힘줘 말했다.

배 여사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아무리 내가 초라해도 그냥 엄마니까. 이한열이의 엄마가 역할을 하고 싶은 거지. 내 아들이 이한열이니까, 엄마의 역할을 하고 싶었으니까"라고 말했다.

j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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