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 스티글리츠, 고장난 미국 자본주의를 해부하다
신간 '거대한 불평등' 출간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밀물이 밀려들면 모든 배가 떠오른다"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은 성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구호로 자주 인용된다.
창의력과 추진력을 가진 소수의 선도자가 성장의 물꼬를 트고 이끌어야 그 뒤의 사람들까지 혜택을 본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선도자는 재벌기업이 될 수 있다.
이는 상위 고소득층의 부(富)가 늘어나면 파급효과가 하위계층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낙수효과(落水效果)로도 불린다. 이같은 성장주의는 단순한 시장의 속설이 아니다. 주류 경제학의 지지를 받으며 지역·계층에 상관없이 널리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처럼 통념화된 성장주의에 반기를 든 대표적인 경제학자다.
그는 낙수효과를 허구라고 비판한다. 미국은 앞장서서 상위 고소득층 위주의 경제 정책을 폈으나, 낙수효과 없이 부의 편중만 심화해 세계 최악의 소득 불평등 국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신간 '거대한 불평등'(원제 The Great Divide)은 한때 전 세계의 성장을 이끌며 부러움을 샀으나 지금은 고장 나 버린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초래된 '대침체(Great Recession)를 미국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들며 그 원인과 과정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책은 저자가 10년간 신문과 잡지에 불평등을 주제로 발표한 칼럼들을 모았다.
책에 따르면 대침체의 발단은 금융시장 규제를 역설한 폴 볼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을 해임하고 자유시장주의자인 앨런 그린스펀을 후임자로 지명한 1987년 레이건 행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공황(Great Depression) 직후 도입된 금융규제법인 글래스-스티걸법을 1999년 폐지해 금융시장의 고삐를 풀어놓은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2001년부터 조지 W.부시 행정부가 도입한 대규모 부자 감세조치였다. 감세조치 후 경기부양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자, 경기부양 과업을 떠안은 연준은 유례없이 낮은 금리와 유동성 공급을 단행했다. 이는 주택담보대출 시장을 비롯한 금융시장의 거품을 유발하며 글로벌 금융위기의 기폭제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시 행정부가 강행한 이라크 전쟁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명목상 비용만 5천억 달러가 넘는 전쟁비용은 정부 재정을 악화시켜 재정정책을 마비시켰고, 전쟁으로 인한 유가 폭등은 소비를 위축시켜 경기침체를 유발했다.
책은 이 모든 정책 실패가 자신의 이익만을 탐욕적으로 추구하는 소수의 부유층과 이해집단, 정치권의 결탁 때문에 빚어졌으며 이는 불평등이라는 동일한 현상으로 수렴됐다고 분석한다. 특히 대침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시 등장한 부자 감세정책과 금융기관에 대한 맹목적인 재정지원이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점을 부각한다.
경기회복을 위한 해법으로는 불평등을 개선해 수요를 진작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부의 재정정책과 균형 있는 조세정책, 엄격한 금융시장 규제 정책을 주문한다.
불평등 문제에 천착해온 경제학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스티글리츠 교수의 불평등 경제이론은 남다른 설득력을 가진다. 그는 규제 없는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이지만 여전히 '주류 경제학자'로 분류된다.
그는 불평등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 면에서도 나쁘다고 설파한다. 불평등은 총수요를 약화해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심화할 경우 경제의 건전성을 해치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평등의 개선은 저소득층뿐 아니라 고소득층에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불평등을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적인 문제로 보는 '21세기 자본론'의 저자 토마 피케티와 같은 좌파 경제학자들과 궤를 달리한다. 그는 불평등의 원인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정책과 정치의 실패에 있다고 본다.
그는 불평등이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로 본다. 그래서 제 기능을 못 하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짝퉁 자본주의'라 부른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확신한다. "미국의 심각한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경제 법칙이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 정책과 정치가 초래한 결과다"라고.
열린책들 펴냄. 이순희 옮김. 576면. 2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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