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여성살해 1주기 추모…"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여성단체 연대 기자회견…"여전히 폭력·혐오 만연" 지적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김현정 기자 = "우연히 살아남은 우리는 다시 포스트잇을 들겠습니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주기인 17일 정오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여성단체들이 연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우연히 살아남은 자'들로 규정했다. 여성 누구라도 지난해 5월 17일 새벽 강남역 인근의 유명 노래방 건물 남녀공용 화장실에 들렀다면 살해를 당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당시 23세 여성 A씨를 흉기로 살해한 범인 김모(34)씨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라고 결론지었지만, 여성운동계에서는 "여성을 기다렸다가 범행했다"는 김씨의 진술내용에 근거해 해당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통을 자랑하는 주요 여성단체와 '불꽃페미액션', '범페미네트워크' 등 신진 여성단체들이 연대했다.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모인 '강남역10번출구' 등 신생 단체도 함께 했다.
참가자 60여명은 대부분 고인에 대한 추모 의미로 검정 의상을 입었다. 검정 마스크나 선글라스를 착용한 이도 있었다. 휠체어를 탄 여성장애인도 1명 참가했고, 남성은 3명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지난해 사건 당시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3만여장의 접착식 메모지(포스트잇)에서 따온 문구들을 포스트잇 모양 천에 적어 들었다. '여성에겐 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좋아하는 치마를 입고 밤거리를 다니고 싶다', '차별과 폭력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등이 적혔다.
이들은 이날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조용하고 조신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여성은 더 연대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의 가해자는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범행의 본질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지독하게도 범행의 본질을 보려 하지 않았다. 경찰과 정부는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며 오히려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했고, 여성들의 추모 움직임에 온라인상 혐오와 폭력이 자행됐다"고 되짚었다.
이들은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여성운동 현상이 이어졌다"면서 "SNS에서 문화예술계나 학교 등 곳곳의 성차별과 여성폭력이 고발돼 실제 형사처벌이 이뤄졌고, 촛불집회에서도 성평등 집회 문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여성폭력과 살해는 일상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차별에서 기인한다"면서 "성차별적인 우리 사회 구조와 문화를 개선하도록 정부는 노력해야 하며, 여성단체들도 사회 전반에 성평등 의식이 보편화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자유발언에서는 강남역 사건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영순 공동대표는 "여전히 여성들은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몰카'를 찍히고, 성추행을 당하고, 가족과 친구에게마저 성폭력을 당하고 있다"면서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은 주체적으로 요구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연대하고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꽃페미액션 소속 김세정씨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종이 되는 것을 '팔자'라고 하면서, 잘못됐다고 말하면 피곤하고 예민하다고 취급하는 이상한 세상이 있다"면서 "혼자는 고립되고 외롭지만 우리는 이제 연결돼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 신촌과 홍대 번화가에서 추모행동을 잇는다. 오후 7시에는 지난해 사건 발생장소 인근인 신논현역에서 추모 문화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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