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옥살이 24년새 사람들 주머니마다 컴퓨터가"
14세 때 방화치사 혐의로 수감된 美시카고 남성, 무혐의 석방
(시카고=연합뉴스) 김 현 통신원 = 방화치사 혐의로 철창에 갇혔던 열네살 소년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 교도소를 나왔다.
24년 만에 교도소 밖 세상을 본 그는 "모든 사람들이 '주머니 속에서 신호음을 보내는 컴퓨터'를 한 대씩 소지한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5일(현지시간) 시카고 언론에 따르면 1993년 시카고 남서부 브라이튼파크지구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애덤 그레이(38)가 24년 복역 끝에 검찰의 무혐의 처분을 받고 지난 3일 밤 출소했다.
시카고를 관할하는 일리노이 주 쿡카운티 검찰은 그레이의 혐의를 유죄로 확정한 '과학적 수사방법'에 의문이 제기되자 석방 결정을 내렸다.
당시 수사당국은 8학년(한국의 중학교 2학년)이던 그레이가 공동주택 2층 테라스와 계단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며 "이 건물에 살던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화가 나서 저지른 일"이라고 발표했다.
화재 발생 후 소녀와 부모는 대피했으나, 2층에 살던 50대 남성과 70대 여성이 숨졌다.
검찰은 화재 전문가 2명의 의견을 수렴, 발화제를 이용한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였으며 "그레이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고 밝혔다.
자전거 타기와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던 평범한 중학생 그레이는 "수사관들에게 결백을 호소했지만 무시됐고, 강압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판결을 거스르지 못했다.
출소 하루 만에 취재진 앞에 선 그레이는 "설렘 때문에 한 시간밖에 잠을 못 잤다. 24년간 떨어져 산 가족과 함께 하고, 그간 놓친 것들을 따라잡기 위한 열망에 차 있다"며 "아직 멀미를 하는 기분이지만, 도시의 소음에 다시 익숙해져 가는 일이 나쁘지 않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그는 사람마다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것을 20여 년 전과 가장 다른 모습으로 꼽으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지금 갖고 있는 닌텐도 게임기부터 없애야겠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레이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죽게 되리란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복역기간 '누군가 내게 해를 입혔다 해도 모두 내 탓이라 생각하고 용서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사건이 발생한 1990년대 초는 이미 과학적 분석이 범죄 수사에 활용되기 시작한 때이지만 검경의 수사 결과는 신뢰할 만하지 못했고, 이를 번복하는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지적했다.
그레이는 청소년 교도소에 있을 당시 미술교사에게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것을 계기로 반전 기회를 찾았다.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변호인단이 2010년 그레이 사건을 재조명, 재판에 제시됐던 '과학적 분석 자료'의 허점을 발견했고 미성년자였던 그레이가 보호자 없이 8시간 동안 신문을 당한 점도 문제로 지적하면서 재조사를 추진했다.
쿡카운티 검찰도 작년 여름 그레이가 재심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으나, 법원은 '변호인단이 그레이의 무죄 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해 보이지 못했다'며 재심 요청을 기각했다.
결국 변호인단이 작년말 항소했고, 검찰이 최근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그레이는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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