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환상을 제공하는 청각적 마약이라고?…음악의 과학
신간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가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스물네 살이던 1827년 연극 '햄릿'에 출연한 영국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고백한 사랑을 거절당한 뒤 대표작인 '환상 교향곡'을 썼다.
1~3악장은 우아하고 느린 선율로 사랑하는 연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지만, 4악장은 연인을 죽이고 처형당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표현되고, 5악장에선 기괴한 마녀들의 축제 속에서 연인을 보는 장면이 그려진다.
신간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펴냄)는 이 같은 '환상 교향곡'이 여성에게서 얻고 싶은 사랑을 얻지 못했을 때 남성이 느끼게 되는 보편적인 적의를 형상화했다고 파격적인 해석을 내린다. 이는 짝짓기 경쟁에서 배제된 동물들의 본능적 적의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저자이자 작곡가인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는 예술을 현실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로 보려는 순수예술론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음악을 보편적인 인간성 혹은 동물적 본성의 일부로 보고 음악적 본능의 신경적·유전적 토대를 분석한다.
이를 위해 진화론과 진화심리학, 인지과학, 지식사회학, 중력이론, 엔트로피이론과 같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이론들을 두루 활용한다.
책은 음악과 예술이 오래전 동물들의 구애 수단으로 진화했고, 인간은 6만~3만 년 전 인지 혁명을 통해 구축한 '통합적 마음'을 통해 지금과 같은 음악을 갖게 됐다는 진화심리학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현대 음악은 과거 어느 때보다 과학 등 다른 지식과의 통합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오늘날은 어딜 가든 음악이 넘쳐난다. 음악은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과 음악의 맥락을 인식하지 못하는, 맹목적인 음악의 향유는 값싼 환상을 제공하는 '청각적 마약'일 수 있다고 책은 지적한다.
대표적인 사례를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등 위대한 독일 음악가들의 작품을 살육과 학살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던 나치에서 찾는다.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의 주역들은 그릇된 독일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국민의 비판의식을 거세하는 데 음악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나치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라디오를 통해 독일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매일 20시간씩 송출했다고 한다.
책은 음악 감상이 단순히 감각적 쾌락이나 심리적 위안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음악을 사유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예술적 권위는 예술이 인류의 자연적·사회적 생존의 문제에 대한 통찰과 영감을 줄 때 부여된다고 본다.
저자는 독서와 사유로 단련된 인식 능력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음악은 피곤함에 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지만, 그 치유·힐링은 세상을 잊게 하는 헛된 환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696쪽. 3만원.
abullapi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