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유승민, '대선前 신당 창당=실패' 전철 밟나

입력 2017-04-30 08:50
위기의 유승민, '대선前 신당 창당=실패' 전철 밟나

'92년 정주영, 패배 후 비자금 수사 등 후유증으로 정계은퇴

'97년 이인제, 경선불복 뒤 국민신당 창당…10개월만에 해체

'02년 정몽준, 노무현으로 단일화…선거 전날 지지철회 파문

'07년 문국현, 낙선 후 총선 성적도 저조…본인 의원직 상실

(서울=연합뉴스) 김동현 기자 = 바른정당 유승민 대통령 후보가 낮은 지지율과 당내 분란으로 고전하면서 과거 신당(新黨) 창당을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후보들의 운명을 되풀이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30일 정치권에 따르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여섯 차례의 대선 가운데 2012년 18대 대선을 빼고는 신당 후보들의 대권도전이 계속됐다.





첫 시도는 1992년 14대 대선 때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통일국민당이 창당 직후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31명을 당선시키며 정치권에 일대 파장을 몰고 왔고 정 회장은 총선 승리를 발판으로 대선에 출마했다.

정 회장의 '왕회장'답게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았지만 16.31% 득표율로 3위에 그쳤고 패배 뒤의 후유증도 컸다.

정 회장은 다음해 현대 비자금 문제로 기소된 뒤 짧은 정치실험을 마감했고, 국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 당시 경기도지사가 그해 10월 10일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다.

당시 이 후보의 득표율은 19.20%로 3위에 머물렀고 국민신당은 이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1석도 얻지 못하면서 결국 10개월 만에 해체됐다.

이 후보는 '보수표의 분열'을 가져와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가져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아들 정몽준 의원이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창당한 국민통합21의 대선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를 계기로 급부상한 정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극적인 단일화 협상을 타결했지만 여론조사를 거쳐 노 후보가 단일 후보로 확정됐고 정 의원은 선거 전날 지지를 철회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민통합21은 울산에서 당선된 정 의원을 제외한 전원이 낙선했다.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가 나섰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범여권이 분열한 상태에서 문 대표는 5.82%를 득표하는 데 그쳤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회창 후보(15.07%)에게도 밀려 4위를 기록했다.

총선 6개월 전 만들어진 창조한국당은 18대 총선에서 고작 지역구 1석과 비례대표 2석을 얻었고 이후 문 대표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현재로서는 바른정당의 대권 도전 역시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

유 후보는 지금까지 주요 여론조사 지지율이 5%를 넘지 못했고 바른정당 안에서도 보수 후보 단일화를 위해 유 후보가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은재 의원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탈당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그동안 사례를 보면 신당의 대선 후보는 기존 정당의 주류 세력에 밀려서 나온 비주류나 정치권에 처음 몸담는 신인들"이라며 "이들이 조직과 인지도 등 여러 면에서 열세인 신당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선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blue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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