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에 반한 대한민국]①슬로시티 10년…너도나도 '슬로 슬로'
신안·전주 등 국내 11개 도시 가입, 시·군 앞다퉈 가입 경쟁
관광 활성화 수단으로 전락…상업화, 환경훼손 부작용도 속출
[※ 편집자 주 : 전남 담양군 창평면 등 4개 지역이 아시아 최초로 국제슬로시티연맹 인증을 받은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현재 11개 도시가 가입했고 경북 영양 등 다수 지역이 가입을 추진 중입니다. 슬로시티운동은 패스트 식품과 빠른 삶을 거부합니다. '슬로푸드 먹기'와 '느리게 살기'를 목표로 합니다. 물질만능 시대가 주는 생활의 편리함과는 반대로 치열한 경쟁에서 오는 불안과 강박 관념 등을 쉽게 떨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20여 년 전 유럽을 중심으로 소박하면서도 품위있는 삶을 살자는 '느림의 미학'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슬로시티로 지정받은 국내 일부 도시가 상업화 등의 문제로 재선정에서 탈락하는 등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국내 슬로시티 가입 현황과 실태, 긍정적 효과와 문제점을 점검하고 '느리지만,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한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지를 3편으로 나눠 짚어봅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슬로시티운동은 1999년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 사이에 있는 포도주 주산지인'오르비에토시'에서 처음 시작됐다.
기존에 만연한 '패스트푸드'를 거부하고 깨끗하고 신선한 먹거리로 만든 음식을 먹자는 '슬로푸드 운동'이 출발점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슬로푸드의 이념과 철학, 가치를 기반으로 한 슬로시티 운동으로 번졌다.
◇ 슬로시티운동? "달팽이 같은 느림을 추구하는 삶 지향"
이 도시에서는 대형마트와 즉석식품을 판매하는 패스트푸드점이 사라졌고, 급기야는 대기오염과 소음을 야기하는 자동차 유입도 줄면서 도시민의 삶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슬로시티운동은 기본적으로 '느리게 살자'는 취지를 표방한다.
속도와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빠른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 환경이 조화를 이루며 즐겁고 여유롭게 살아가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달팽이는 살벌한 생태계에서 '느림'이란 생존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다.
국제슬로시티 국제연명의 로고가 마을을 등에 업고 있는 달팽이 모습을 채택한 것도 슬로시티 정신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슬로시티 선언문을 보면 이런 취지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갖는 도시, 훌륭한 극장, 카페, 여관, 사적 그리고 풍광이 훼손되지 않은 도시, 전통 장인의 기술이 살아있고 현지의 제철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도시, 건강한 음식과 즐거운 삶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추구한다."
◇ 30개국 225개 도시 가입…국내 현재 11곳 가입
1999년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설립된 이래 현재까지 전 세계 30개국에서 225개 도시가 가입했다.
국내에서 슬로시티에 가입한 곳은 모두 11곳이다.
전남 신안, 완도, 장흥, 담양군이 2007년 12월 아시아 최초로 국제슬로시티로 인정받은 이후 경남 하동군, 충남 예산군, 경기도 남양주시, 전북 전주시, 경북 상주시·청송군, 강원 영월군, 충북 제천시 등이 차례로 가입했다.
제천시와 청송군이 재인증 신청을 추진 중인 가운데 경북 영양군은 오는 5월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슬로시티 총회에서 인증 여부가 결정된다.
국내 1호 슬로시티인 담양군 창평마을은 도시 인근 농촌으로 현대와 전통이 잘 조화를 이루는 대표마을로, 봄이면 섬 전체가 샛노란 유채꽃밭으로 변하는 완도군 청산도는 섬 곳곳으로 이어진 구불길로 주목받으며 지난 10년간 슬로시티 '원년 멤버'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차와 문학의 고장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생태공원이 있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신라와 가야국 고도인 경북 상주시 함창면, 청정한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도 힐링을 원하는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 가입 도시 거의 모두가 각 시·군의 섬이나 면 단위로 지정됐다면 전주는 도시 전체가 슬로시티 구역으로 인정받은 특별한 사례다.
2010년 11월 700여 채 한옥이 있는 풍남동 한옥마을 일대에 한해 지정된 슬로시티 구역이 2016년 4월 재인증 과정에서 인구 65만의 전주 도시 전체로 확대된 것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전주 한옥마을의 정체성 확립 노력과 전통 수공예 장인의 기술 전승을 위한 노력 등이 결실을 본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전통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시민 인식과 실천이 국제연맹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비결을 털어놨다.
◇ 시·군 슬로시티 가입 경쟁 '후끈'…장흥군 탈락 등 부작용도 속출
많은 시·군이 슬로시티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표면적 이유는 '느림의 미학' 실천을 통한 주민 삶의 질 향상.
그리고 슬로시티 가입을 통한 도시 또는 마을의 이미지 개선, 한 발 더 나가 '관광 활성화'까지 도모해보자는 것이다.
슬로시티 지정을 받으면 많은 관광객의 방문으로 도시 상권이 되살아나는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
급격한 관광객 증가는 상업화를 부추겨 자칫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는다.
전주시도 지난해 1천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아 상권부활엔 성공했지만 '먹자판 문화'가 확산하면서 이제는 큰 고민에 빠졌다.
섬 지역인 청산도와 증도는 슬로시티 가입 이후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불법 펜션, 바가지요금 등으로 오히려 몸살을 앓고 있다.
슬로시티국제연맹 심사는 까다롭다. 지정을 받았더라도 5년마다 이뤄지는 재심사를 통과해야 슬로시티 도시로서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다.
그동안 충남 태안과 전남 구례, 전북 장수 등이 꾸준히 슬로시티의 문을 두드렸지만, 국제슬로시티가 제시하는 엄격하고 깐깐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상업성이 지나치거나 슬로시티 정신과 철학, 가치를 고수하지 못하는 도시는 재인증 심사에서 가차 없이 탈락시키기 때문에 현재 가입된 도시들도 항상 긴장감을 늦출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2013년 재승인 과정에서 적은 슬로푸드 식당과 관광·체험 프로그램의 영리화 등을 지적받은 전남 장흥군은 탈락한 대표적 사례다.
슬로시티 이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성호·공병설·배연호·이강일·임청 기자)
lc21@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