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에 반한 대한민국]② 삶의 질 향상 vs 돈벌이 수단 전락

입력 2017-04-30 07:38
[느림에 반한 대한민국]② 삶의 질 향상 vs 돈벌이 수단 전락

장흥 슬로시티 재인증 '실패' 쓴맛…전주 한옥마을도 상업화로 '몸살'

(전국종합=연합뉴스) "느림은 단순히 빨리빨리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환경, 자연, 시간, 계절과 우리 자신을 존중하며 느긋하게 사는 것입니다."

국제슬로시티 운동의 창시자 파울로 사투르니니는 '느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슬로시티의 취지는 돈벌이가 아니라 경쟁과 다툼으로 내몰지 않는 진정한 삶을 위한 '생활혁명'이라는 것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국내 자치단체가 '느림의 미학'을 존중하기도 하지만 일부 지자체는 지나친 상업화 추구로 그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09년 2월 슬로시티에 가입한 경남 하동군은 2011년 전담 부서를 신설하고 6억1천만원으로 대표 특산물인 대봉감과 하동 녹차·간장 등을 이용한 슬로푸드 육성사업을 벌였다.

짚신, 멍석 등 전통 공예품을 제작하는 장인을 발굴해 수공예품 생산·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을 관광객에게 선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통공예장도 만들었다.

아루로 평사리 공원에서 최참판댁, 조씨 고가, 문암송, 동정호, 부부송으로 이어지는 악양 슬로시티 토지 길을 자전거나 도보로 갈 수 있는 관광상품도 개발했다.

10월 열린 토지문학제 때 제기차기, 윷놀이, 콩 타작 등 슬로시티 체험 행사를 운영하고, 슬로시티 공식 차(茶)로 지정한 하동 녹차 전시와 시식회도 열었다.

이런 요인이 겹치면서 국내외 관광객 수가 크게 늘었다.

국내 관광객은 2013년 176만 5천여 명, 2014년 187만 2천여 명, 2015년 239만 6천여 명으로 해마다 급증했다. 외국인 관광객은 2014년 3천960명, 2015년 6천470명, 지난해 5천870명으로 대체로 증가 추세를 보인다.

하동군 관계자는 "슬로시티 지정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동의 브랜드 가치가 오르고 관광객이 증가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고 자평했다.



경북 청송군은 지난 2월 슬로시티로 재인증받았다.

청송은 주왕산을 중심으로 천혜의 자연자원과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곳으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는 사과 주산지이다.

청송이란 지명도 불로장생의 신선 세계, 인간답게 살기에 적합한 이상 세계를 뜻해 슬로시티 기본이념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슬로시티에 가입했다.

청송은 인증을 받은 뒤 산촌형 슬로시티 이미지에 맞게 산약초타운 건립, 장난끼 유아 숲 체험장 운영, 외씨버선길·솔누리느림보길 등을 조성했다.

청송이 2011년 처음 국제슬로시티 인증을 받을 때는 부동면과 파천면 일대에 한정됐지만, 올해는 군 전역으로 확대됐다.

밝음이 있다면 어둠도 반드시 따라오는 법.



대표적인 슬로시티인 전주의 한옥마을은 교통과 숙박 등 인프라가 채 구축되기도 전에 관광객이 밀려들면서 몸살을 앓았다. 여기에 극심한 상업화와 콘텐츠 부재로 고즈넉함이나 느림의 미학 등 한옥의 정체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2002년 30만 명에 불과하던 관광객은 2008년 13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1천만 명을 돌파했다.

관광객이 몰리면서 한옥마을은 '먹자판' 분위기가 형성됐고 원주민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는 임대료와 소음 등에 시달린다. 관광명소로 주목받으면서 관광객과 시민이 몰리자 한옥을 개조하거나 상업시설이 속속 들어선 결과다.

대부분 가게가 아크릴 간판 등을 내걸면서 전통 이미지가 사라져 한옥마을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

2013년 전남 장흥군과 신안군은 슬로시티 재인증 심사에서 각각 퇴출·보류됐다.

5년마다 실시되는 슬로시티 재인증 심사 결과, 장흥군은 탈락했고 신안군 증도는 보류 끝에 1년 만에 재인증을 받았다.

2007년 12월 슬로시티로 지정된 증도는 재인증 평가항목의 답변이 불충분하고 5년간 성과보고가 미흡하다는 게 이유로 회원자격이 보류됐었다.

일반 숙박업소와 식당에서 슬로시티 로고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자치단체의 철학 인식과 관심이 부족한 것도 보류 사유로 지적됐다.



자격을 잃을 뻔한 증도는 절치부심 끝에 1년여 만에 그 지위를 회복했다.

장흥군은 일부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상업화돼 영리를 추구했고, 신안군 증도는 연륙교가 설치되면서 섬으로서 정체성을 잃고 외지인이 급증하면서 환경이 파괴돼 가는 점이 재인증에 걸림돌이 됐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통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한다는 슬로시티의 기본 정신과 거리가 멀었다.

장흥은 슬로시티 실적 자료가 불충분한 점을 비롯해 관련 사업과 슬로시티와의 연관성 부족, 별도 부서와 슬로푸드 식당 부재, 낮은 공무원 인식도 등이 발목을 잡았다.

또 관광과 체험 위주 프로그램이 운영되면서 일부 영리를 추구한 측면이 감점 요소로 작용했다.

곧장 장흥은 슬로시티 상표를 사용할 수 없게 돼 표고버섯 등 특산물 판매와 관광객 유치에 타격을 받았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슬로시티가 '느림의 미학'을 추구한다면 국내 자치단체는 아직 '돈벌이'에 이용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때문에 슬로시티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일자리와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한국형 슬로시티'를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강일 지성호 김동철 기자)

sollens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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