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구석기 시대 '맥가이버'를 만나다

입력 2017-05-13 08:01
[연합이매진] 구석기 시대 '맥가이버'를 만나다



(연천=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약 50만 년 전 뜨거운 용암이 옛 한탄강 유역을 따라 흘러 거대한 용암대지를 형성했다. 수많은 물줄기가 대지를 갈라 흐르고 곳곳에 습지와 호수가 생성됐다. 이후 대지 위에 퇴적물이 쌓이자 숲이 우거지고 강에는 물고기가 살고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그야말로 따뜻하고 아름답고 먹거리가 풍부한 지상낙원이었다. 마침내 35만 년 전쯤 이 풍요로운 땅에 구석기인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최초로 완전하게 곧게 서서 걷고, 도구와 불을 사용한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 언어로 의사소통하고 옷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호모 에렉투스는 150만 년 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이후 10만 년 전까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곳곳에서 무리 지어 생활했다. 경기도 연천 전곡선사유적지에서는 곧선사람이 활동한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 데이트 중 발견한 구석기 주먹도끼



1978년 3월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주한 미군 그렉 보웬은 한탄강 유원지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중 모양이 특이한 돌을 발견했다. 심상치 않은 돌이라는 것을 직감한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전문가인 프랑수아 보르드 교수에서 사진과 발견 경위를 적은 편지를 띄웠다. 보르드 교수는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지만 그럴 수 없으니 김원용 서울대 교수를 찾아가도록 하라"는 답장을 보냈다. 보웬이 가져온 돌을 본 김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주먹도끼는 서구의 전유물이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동아시아 지역은 찍개(자갈돌을 한쪽에서만 타격을 가해 떨어져 나간 면과 원래의 자갈 돌면이 날을 이루는 석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이는 서양인이 동아시아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됐다. 전곡에서의 주먹도끼 발견 이후 기존 학설은 뒤집혔다.

김소영 전곡선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전에는 단순히 돌을 쳐서 만든 박편이나 조각을 사용했지만 주먹도끼는 사람들이 미리 생각해 고차원적으로 만든 도구"라며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동아시아에서도 인류의 보편적인 흐름이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구석기인과의 대화마당 '전곡선사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은 구석기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우주선 같은 은빛 유선형 건축물은 2013년 한국건축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건축 베스트7'에 선정됐을 정도로 특이하면서도 유려하다. 전곡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구석기 최고의 스마트 도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박물관을 이런 모습으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선사시대 동굴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실내에서는 구석기 시대를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것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규격화된 도구인 주먹도끼 5점. 주먹만 한 도끼들이 문명이 발달한 고등 외계인의 도구라도 되는 듯 느껴진다. 주먹도끼는 좌우가 대칭이고 끝이 뾰족한 타원형이다. 곧선사람이 주먹도끼를 만든 것을 보면 이들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을 정도로 지적 수준이 발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700만~1만 년 전 원시인류의 조상들이 늘어서 있다. 700만~600만 년 전에 활동한 투마이를 시작으로 루시와 루시앙, 얼굴이 넓적한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루돌펜시스가 차례로 나타난다. 여기까지는 사람이라기보다 원숭이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드디어 허리를 곧게 편 인류가 등장한다. 바로 호모 에렉투스다. 이후에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국내 최고의 고인류인 평안도 '용곡인' 상도 눈길을 끈다. 인류의 모형들은 표정과 눈빛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선사시대 동굴벽화도 볼 수 있다. 구석기 시대 프랑스의 유적인 라스코 동굴을 비롯해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등에 그려진 벽화를 실제처럼 복원했다. 동굴을 지나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황소와 말, 맹수 등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매머드 뼈로 만든 막집 모형, 외츠탈 알프스에서 발견된 5천300년 전 냉동 미라 모형, 매머드와 검치호랑이 등 선사시대 동물들의 화석 뼈들도 흥미롭다.



◇ 유적 발굴 장소에 토층전시관

전곡선사박물관 뒤편 언덕의 계단을 오르면 연천 전곡리 유적지로 이어진다. 주한미군 병사가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를 발견한 곳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은 총 4천600여 점에 달한다. 유적지 면적은 2.55㎢(약 77만 평)로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김소영 학예연구사는 "국내외적으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곳은 유물만 발굴한 이후 대부분은 땅속에 묻혀버린다"며 "이렇게 넓은 유적지가 사적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는 점은 고고학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곳 토층전시관은 실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된 곳이다. 당시 발굴 현장을 보존해 방문객이 관찰할 수 있게 했다. 발굴 당시 현장 사진과 구석기 유물 20여 점도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구석기 유적 형성 과정과 구석기인의 생활 모습을 담은 영상도 볼 수 있다. 야외 공간에서는 동물을 사냥하고 석기를 제작하는 등 구석기인의 생활 모습을 모형으로 볼 수 있다. 주먹도끼를 만들어보는 등 구석기 시대를 체험할 수 있는 선사체험마을도 있다.

전곡선사박물관에서는 선사예술 특별전 '구석기 비너스가 부르는 노래'가 내년 2월 말까지 진행된다. 구석기 시대 대표 조각 예술품인 비너스상과 동물상을 중심으로 선사예술을 소개하는 자리다. 구석기 시대 예술조각상 150여 점과 예술품의 재료인 상아와 뿔, 제작도구인 뗀석기 등 50여 점을 볼 수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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