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의 나무예찬

입력 2017-05-07 08:01
[연합이매진]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의 나무예찬

"풀과 나무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삶도 초록으로 바뀐답니다"

(포천=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봄비가 내려서 더 그런가? 고요한 숲은 봄 색깔을 시시각각 더해가는 것 같았다. 진달래는 연분홍으로 한층 곱게 치장했고, 철쭉은 푸른 잎을 삐죽삐죽 앙증맞게 내밀었다. 국내 최대의 생물다양성 보고인 경기도 포천의 광릉숲. 그곳의 소리봉(해발높이 537m) 자락에는 국내외 식물을 보전·관리하는 국립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유미(55) 원장은 산림청 개청 이래 여성으로선 최초로 그 수장 자리에 올라 화제가 된 바 있다. 스테디셀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가지'의 저자이기도 한 이 원장을 지난 4월 중순 수목원에서 만나 봄의 소회를 꽃과 나무 얘기와 함께 들어봤다.





"자연의 힘은 정말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고 할 만큼 변화무쌍하지요. 그러니 달마다, 계절마다 느끼는 감회는 얼마나 크겠어요! 자연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교감하다 보면 절로 행복해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 원장은 수목원의 소리정원을 기자와 함께 거닐며 풀, 나무와 더불어 사는 기쁨과 소회를 찬찬히 들려줬다. 조팝나무는 꽃 이름 그대로 좁쌀을 튀겨놓은 듯 하얗게 피었고, 피나물은 황금색의 샛노란 자태를 뽐내며 봄을 노래했다. 바위틈 사이에선 돌단풍이 하얀 꽃과 푸른 잎을 흔들거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원의 개울을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다 보면 천국이 따로 없다 싶었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노거수(老巨樹)가 우람하고 유장하게 서 있다. 온갖 고초를 이겨낸 뒤 이제는 삶을 묵묵히 관조하는 원로의 모습이랄까.

"바로 우리나라 계수나무의 부모나무예요. 1900년대 초반에 심어져 전국에 묘목을 보급한 어버이인 셈이지요. 봄에 피는 꽃도 좋지만 가을이면 가장 먼저 노란 단풍을 펼쳐낸답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기는 또 어떻고요. 부부싸움을 한 뒤에 저 나무 곁에 가면 그 향기에 취해 저절로 화해가 된답니다!(웃음)"



◇ 산림청 개청 이후 첫 여성 고위공직자



국립수목원이 있는 광릉숲은 1469년 조선 세조 때 지정된 왕실 능림으로 500년이 넘도록 온전히 보전된 생물다양성의 보고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온갖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광릉숲만은 이렇다 할 피해 없이 용케 살아남았다. 단위면적당 생물다양성이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 국립수목원이 생물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가장 풍부하게 보관하고 제공하고 있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 원장은 2014년 4월 광릉숲 보전과 산림식물의 보전·관리를 총괄하는 제9대 국립수목원장으로 임명됐다. 산림청 개청 47년 만에 고위직에 오른 첫 여성 공직자였다. 서울대 임학과 출신의 이 원장은 1994년 산림청 임업연구원 연구사로 공직 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뒤 수목원과 식물분류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활동해왔다. 국립수목원의 연구직 공무원이 자체 승진해 원장 자리에 오른 첫 사례이기도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만큼 바빴지요. 2014년에 유용식물증식센터가 개원하고 지난해에 DMZ자생식물원이 문을 연 데 이어 올해는 수목원이 책임운영기관으로 전환돼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성과와 실적이 있게 해준 직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지난 3년 사이의 변화는 이 밖에도 많다. 2015년의 '우리 식물주권 바로잡기'가 그 한 사례. 광복 70주년을 맞아 소나무에조차 붙여졌던 일본식 이름을 영어명으로 바꿔 알려온 것이다. 우리 특산식물 33종을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권위 있는 보고서인 '레드 리스트'에 국내 최초로 등재되도록 했고, 지난해 11월에는 국내 자생식물 2천945종을 총망라한 '한국 관속식물 분포도'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분포도 발간으로 우리 식물의 주권 확보와 기후변화에 따른 식물자원 보존·이용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 스테디셀러 '우리 나무 백가지'

이 원장은 임업연구사로 산림청에 들어온 이듬해에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가지'를 펴내 주목받았다. 국내 최고의 나무 길잡이 도서로 평가받는 이 책은 국내에 자생하는 나무 100가지를 골라 그 생태는 물론 인문학적 정보까지 두루 요약 정리해 사진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스테디셀러 위치를 굳건히 다져왔다. 1995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2005년 개정판에 이어 지지난해에 개정증보판이 발행됐다.

"대학원 시절에 한 월간지에 나무 이야기를 썼던 게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현암사가 책의 출간을 요청해오면서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갔지요. 당시는 유명한 나무 외에는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한 나무 한 나무 완성하기까지 온종일 그 나무만을 생각했어요. 초판 발간 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보 부족이 다시 느껴졌고, 개정판을 내어 보완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책이 됐고요."

이 원장은 보통사람이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우리 주변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살피고 따뜻이 보듬어 정보화해왔다. 그 속 깊은 애정은 유실수와 무실수, 토종과 귀화종을 가리지 않았다.

"기운생동하는 봄이면 꽃과 나무가 아름답게 피어나고 자라나는데 올해는 조팝나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와요. 박사학위 논문의 대상 식물이어서 더 그럴까요? 그 하얀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맑아짐을 느낀답니다."

이 원장을 식물 사랑으로 이끈 첫 주인공은 철쭉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집안 정원에는 나무가 심어졌는데 식구마다 자기 나무를 하나씩 정했다. 당시 이 원장의 나무가 바로 철쭉. 그 화사한 꽃 빛에 끌린 이 원장은 서울 토박이이긴 하지만 봄마다 어머니와 꽃씨를 심고 가꾸면서 수목과 알게 모르게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됐다.

봄이면 환한 황금빛 꽃송이를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히어리도 특별한 애착이 가는 나무 중 하나. 화사한 모습과 이름이 주는 곱고 세련된 느낌 때문에 외래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생해온 대표적 특산식물이다. 이 원장은 "히어리는 우리 것은 덜 화려하고 어쩐지 세련되지 않으며 조금은 왜소하다는 잘못된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주는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나무"라면서 "이른 봄에 가지 가득 달린 노랗고 작은 꽃송이들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달린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4월 중순은 한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진달래꽃이 전국의 산기슭에서 곱게 피어나는 때다. 수목원 곳곳에서도 진분홍의 꽃들이 지천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삼국유사의 '헌화가'나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 보듯이 우리 민족의 삶을 상징하는 꽃이었으나 한때 북한의 국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척박한 땅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진달래는 산속에 자연스럽게 핀 모습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진달래로 전을 부쳐 먹고 노는 화전놀이나 그 꽃잎으로 빚은 술인 두견주에서 보듯이 우리 민족과 매우 친숙해요. 북한이 한때 국화로 여긴 바 있어 다소 어정쩡했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요. 맘껏 사랑해도 된답니다. 정서적으로 전형적인 우리 꽃이지요. 북한의 국화가 함박꽃나무로 바뀐 지도 오래됐고요."



◇ "광릉숲은 생명의 진귀한 보고"

나무가 안고 있는 유무형의 가치는 실로 무궁무진하다고 이 원장은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 산소로 숨 쉬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근본 바탕이 바로 나무라는 것.

"우리가 마시고 사는 물과 국토의 기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 덕분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류 미래가 달린 신약은 결국 숲의 생물자원에서 대부분 기원하지요. 최근 인류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기후변화문제도 결국 산소가 탄소를 축적하는 일이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더욱이 숲에서 치유하고, 위로받고, 영감을 얻는 등등의 무형 가치까지 생각하면 그 혜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지요. 나무를 보고 있으면 서로 경쟁하는 듯 보이지만 크게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공존·상생의 길을 꾀하고 있음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유일한 온대중부 활엽수림 보존지역인 광릉숲은 한반도 생명의 진귀한 보고다. 이곳에 자생하는 식물은 무려 900여 종. 우리나라 전체 식물의 20%가량이 바로 이 작은 공간에서 산다. 이곳에 수집ㆍ관리되는 외래종은 모두 6천여 종. 온실과 야외에서 각각 3천여 종씩 자란다. 광릉숲의 전체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여덟 배인 2천240ha. 이 중 10% 정도만 일반에 개방된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식물도 많다. 광릉요강꽃, 광릉골무꽃 등 여기서 처음 발견된 식물만도 12종에 달한다. 천연기념물인 장수하늘소의 유일한 서식지로 밝혀지고 일본에서 사라진 방아벌레가 지난 3월 처음 발견되는 등 곤충과 동물들에게도 광릉숲은 천혜의 낙원으로 보전 가치가 그만큼 높다.

아쉬운 점은 국립수목원이 광릉숲에서 지난 16년간 운영해온 산림동물원이 5월 중순 폐쇄된다는 사실. 이 원장은 산림동물원이 제 역할을 다했고 더는 종 보존과 번식 등 연구 가치가 없어 폐쇄를 결정했다면서 동물 탐방로는 그대로 두면서 잣나무숲길과 연결해 생태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산림동물원 폐쇄는 사육 중이던 수컷 백두산 호랑이 '두만'(15살)이를 경북 봉화의 국립백도대간수목원 호랑이숲으로 보낸 게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그동안 예산 부족으로 사육에 어려움을 겪은 데다 동물들이 노쇠해 희귀 동물 보존과 조류의 증식이라는 개원 취지가 사실상 의미가 없어 여러 의견을 수렴해 내린 결정이고요. 나머지도 자연방사하거나 분양할 예정입니다. 아쉬움도 있지만 여기보다 더 좋은 곳에서 살게 한다는 것으로 위안 삼으려 해요."

◇ "자연을 삶에 끌어오는 게 결국 잘 사는 길"

국립수목원의 향후 주요 사업에 관해 물어봤다. 이 원장은 "앞으로 5년간 우리 야생화 품종 개발과 재배 기술 향상, 개화 조절기술 개발, 북방계 식물 수집 보전 등에 특히 중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정원 산업이 날로 활성화하는데 여기에 쓰이는 대부분의 식물이 외국 식물이에요. 현재 정원 산업에서 활용되는 자생식물은 10% 미만입니다. 이는 플록스, 가우라, 루드베키아 등 외국 품종이 10개 심어질 때 우리 야생화는 한 종 미만이 활용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서가 담긴 우리 야생화를 끌어안는 것이 우리 생물자원의 주권도 살리고 야생화 산업의 저변확대로 꾀하는 데 중요하다고 봐요."

이 원장은 급격한 도시화와 난개발 등의 영향으로 생물다양성이 날로 위협받고 있는 세태에도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2030년까지는 도시면적이 지금보다 세 배가량 늘어난다고 합니다. 선진국 사례만 봐도 자연을 삶에 끌어오는 것이 결국은 잘 사는 길임을 알 수 있어요. 우리도 사람과 자연이 차단된 절대적 보전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지는 사례들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자연과 공유하는 기회를 넓혀가면 자연이 알려주는 부분 또한 많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삶에서 풀과 나무를 들여다보시라 권하고 싶어요. 깊은 산 속에 가지 않아도 잠시 멈추고 서서 주변을 바라보면 나무들이, 풀들이 해주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삶은 초록으로 점차 바뀌어갑니다. 가능하면 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보고 이게 어려우면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어 키워보자는 거지요. 그러다 보면 절로 자연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원장은 '우리 나무 백가지' 외에도 '쉽게 찾는 우리 나무' '광릉숲에서 보내는 편지'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나무 백과사전' '한국의 야생화' '내 마음의 야생화 여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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