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은 쉼 없이 도주한 혁명문학의 게릴라 전사"
신간 '루쉰, 길 없는 대지'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중국의 문호이자 사상가 루쉰(魯迅·1881∼1936)은 사방이 적이었다. 그는 반봉건과 혁명이라는 큰 틀에는 동의했지만 어떤 이념과 사상에도 빠지길 거부했다. 봉건사회의 잔재였던 군벌은 물론, 계급투쟁을 외치며 실제로는 제 몫 챙기기에 몰두한 좌파진영과도 격한 논쟁을 벌였다. 늘 수배 중이었고 도망자 신세였다.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루쉰은 유년기에 이미 자신의 가문과 중국·동양 문명의 몰락을 한꺼번에 경험했다. 도주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난징(南京)을 거쳐 일본 도쿄(東京)와 센다이(仙臺)로, 다시 항저우(杭州)·샤먼(廈門)·광저우(廣州)·상하이(上海)로 쉼 없이 거처를 옮겨야 했다.
베이징(北京)에서 공무원이자 교사로 일한 1912년부터는 그나마 안정적인 시기였다. 이때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발표해 작가로서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1926년 톈안먼(天安門) 앞에서 시위대 47명이 학살당한 이른바 '3·18 참사' 때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군벌을 비판했다가 다시 쫓기는 처지가 된다.
신간 '루쉰, 길 없는 대지'(북드라망)는 도주의 연속이라고 해도 무방한 그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며 문학과 사상을 되짚어본 책이다. 고미숙·채운·문성환·길진숙·신근영·이희경 등 고전 연구자들이 코스를 나눠 루쉰이 생활하며 글을 썼던 곳들을 찾은 여행기 형식이다.
루쉰은 센다이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시절 일본인에 둘러싸여 공개 처형당하는 중국인의 영상을 보고 문예운동으로 진로를 바꿨다. 중국인에게 시급한 건 육체의 질병 치료보다 정신 개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말년을 향할수록 소설보다는 '잡문'을 무기로 삼았다. 평생 100가지 넘는 필명을 쓸 만큼 한곳에 머물지 않으며 유랑했다.
1936년 상하이에서 폐병으로 숨질 당시 남긴 유언은 비타협적 게릴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나의 적은 상당히 많다. 만일 신식을 자처하는 사람이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나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결정하였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평생 도망하던 루쉰은 마오쩌둥 공산당에 의해 영웅이자 민족의 상징으로 추대됐다. 그의 관에는 '민족혼'이라고 적힌 깃발이 덮였고 수많은 군중이 추모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고미숙은 이렇게 썼다. "조직도 없고 강령도 없다. 하지만 전략과 전술만은 분명하다. '지구전, 참호전, 산병전'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게릴라였다. 세계혁명문학사에서 가장 고독하고 가장 집요한, 그래서 가장 독보적인 게릴라!" 360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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