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F 주도로 부실기업 정상화 시도…8조원 펀드 만든다
중견기업 구조조정이 1차 목표…대기업은 국책은행이 주도
깐깐해지는 신용위험평가…워크아웃·법정관리 기업 늘어난다
'금융채권자 조정위원회'가 부실기업 적정 매각가격 산정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의 핵심 주체를 채권은행에서 자본시장으로 옮겨놓기 위해 8조원 규모의 구조조정 펀드를 만든다.
국책은행·연기금 등이 4조원의 마중물을 붓고, 민간자금 4조원을 '매칭 투자' 방식으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기업에 돈을 빌려준 채권은행이 구조조정 과정을 좌지우지했지만, 앞으로는 사모펀드(PEF)가 은행에서 부실기업 채권을 인수해 경영 정상화를 꾀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부실기업이 정상화되면 펀드 출자자들은 기업을 비싼 값에 판 뒤 이익을 나누게 된다.
한진해운, 대우조선해양과 같은 대기업 구조조정에까지 이 방식이 적용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위원회는 앞으로 5년 동안 8조원 규모의 기업 구조조정 펀드를 조성하는 내용을 담은 '신(新) 기업구조조정 방안'을 13일 발표했다.
현재 기업 구조조정에 참여하는 펀드가 없는 것은 아니다. 45개의 기업재무안정 PEF가 있다.
기업재무안정 PEF는 지분 투자만 가능한 일반 사모펀드와 달리 투자금의 50% 이상을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의 부동산, 회사채, 주식 등에 투입할 수 있는 펀드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펀드당 평균 규모가 869억원(유암코 운용펀드 제외)에 그쳐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45개 펀드를 모두 합쳐도 지난해 말 기준 5조2천억원 규모다.
PEF를 통한 성공적 기업 구조조정 사례가 부족해 투자자 모집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정책금융기관이 투자하는 기업 구조조정 펀드를 만들어 일단 '판'을 키우기로 했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연기금 등이 먼저 자금을 투입하면 민간 투자자가 매칭펀드 방식으로 출자하는 구조다.
민간과 정부로부터 자금을 받은 펀드 운용사는 부실기업의 채권·주식을 사들인 뒤 사업 재편, 비용 감축 등 기업 정상화를 추진한다. 정상화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기업의 핵심 자산을 팔거나 청산시킨다.
정부가 PEF 주도 구조조정을 강조하는 것은 그간 실패 확률이 높은 구조조정을 금융회사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은행이 주도해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실기업의 고름이 곪아 터져버리기 전에 신속히 구조조정을 하려면 자본시장이 나서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부는 올해 안으로 우선 1조원 규모를 펀드에 출자한다. 이후 4조원까지 서서히 출자 자금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김용범 금융위 사무처장은 "우선 중견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게 1차 목표"라며 "몇조짜리 규모의 대기업 구조조정은 아직은 국책은행 주도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 구조조정 펀드를 통해 정상화를 추진하는 기업이 상거래 활동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책금융기관은 한도성 여신을 제공한다.
산은·수은과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이 1조6천억원 규모의 한도성 여신 지원 및 보증 프로그램을 올해 상반기에 내놓는다.
금융위는 아울러 채권은행이 기업 신용위험평가를 좀 더 깐깐하게 하도록 평가 모형과 운영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각 은행의 신용위험평가 체계가 적정한지도 점검한다.
채권은행은 매년 거래 기업을 대상으로 정기 신용위험평가를 해 A∼D등급을 매긴다.
A등급은 정상기업, B등급은 정상기업이지만 일시적으로 유동성 부족을 겪는 기업이다. C·D등급은 각각 워크아웃과 법정관리에 들어가야 하는 '퇴출 대상'이다.
그러나 부실채권이 늘어나는 게 부담스럽거나 기업과의 장기 거래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채권은행들이 온정적인 신용위험 평가를 해 진작 퇴출당했어야 하는 기업이 정상기업으로 연명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기업 구조조정 방안을 통해 은행의 신용위험평가가 엄격해지면 평가에서 C∼D등급을 받아 워크아웃·법정관리에 들어가는 기업이 늘어나는 등 기업 구조조정 작업이 빨라질 수 있다.
신용위험평가 이후 워크아웃에 들어갈 경우 1년 단위로 연장 필요성을 재평가받아야 한다.
경영 성과 하락에 부담을 느낀 채권은행이 워크아웃 기간을 계속 연장하면서 '손실 털어내기'를 미루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부실채권이 빠르게 매각될 수 있도록 매각 대상 기업의 적정한 매각가격(준거가격)을 평가하는 기관도 지정한다.
지금은 은행(매도자)은 부실기업 채권을 더 비싼 가격에 팔고 싶어 하고, 매수자는 싼 가격을 원해 채권 매각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는 채권은행이나 다른 채권자, 매수 희망자가 신청하면 '금융채권자 조정위원회'가 기업의 적정가격을 산정하게 된다.
이 가격에 근거해 부실기업 채권을 매각한 은행 담당 직원이 추후 '헐값 매각' 논란에 휘말리는 일이 없도록 면책권도 적극적으로 부여한다.
정부는 또 채권금융기관이 보유한 구조조정 기업을 한데 모아 매수-매도자를 연결하는 중계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다.
김 사무처장은 "객관적 신용위험 평가와 워크아웃 지속 여부에 대한 엄격한 평가 등을 통해 부실징후가 있는 기업을 조기에 발굴하면 신속한 구조조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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