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경기 안산의 조선족 목사 오학봉 "부활한 예수가 희망"
5대째 개신교 신봉하는 집안 출신…운전 일하며 7년째 안산서 목회
"같은 문화권서 선교해야 효과적…색안경 벗고 조선족 대했으면"
(안산=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한 문화권에서 똑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하게 생각해온 사람이 선교해야 효과가 높습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한 제가 국내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더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에서 7년째 중국동포(조선족)를 상대로 목회하고 있는 오학봉(53) 예수마을선교교회 담임목사는 이 지역 조선족들에게는 목사이면서도 푸근한 선배이자 든든한 형님 같은 존재다. 그도 자신들과 비슷한 길을 거쳐왔기에 교리 공부나 신앙 상담 말고도 마음 편하게 속상한 일을 털어놓고 도움말을 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절을 나흘 앞둔 12일 예수마을선교교회에서 만난 그는 "여기서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영성 훈련을 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면 이웃에게 한층 쉽게 전도할 수 있고, 나아가 우리 교회가 북한 복음화의 전초기지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오 목사는 5대째 개신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모 성함이 '배마리아'다. 강원도 인제에 살던 증조부는 일제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9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북간도로 이주했다.
맏이인 오 목사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그곳에서 눌러살았으나 선양(瀋陽)의 신학대를 나온 둘째할아버지는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북한을 거쳐 월남해 전북 전주에서 교회를 이끌었다.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과 결혼한 셋째할아버지는 아내와 함께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서울로 가져와 빛을 보도록 했고, 나중에 호주 시드니로 이민해 중국 선교와 윤동주 추모사업에 힘썼다.
조선족 3.5세인 오 목사는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허룽(和龍)시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옌볜사범대를 졸업하고 허룽의 중학교에서 수학과 과학 등을 가르쳤는데, 악기 연주 솜씨도 뛰어나 오 목사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가 어릴 때는 기독교를 드러내놓고 믿지 못했죠. 할아버지께서는 가끔 장롱에서 빨간 표지의 책을 꺼내 한 구절을 읽어주신 뒤 다시 감추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성경이더군요. 옌볜에 가정교회가 생겨난 건 80년대 초의 일입니다."
오 목사는 옌지(延吉)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옌볜대 예술학부 작곡과에 입학했다. 1989년 졸업 후에는 옌지시 문화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2년 뒤 경기도 안양에 살던 둘째할아버지의 초청을 받아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는 한중 수교 전이어서 인력사무소도 없었다고 한다. 새벽에 서울역 지하도에서 기다리면 차가 와서 건설 현장으로 데려갔다.
비계공, 타일공, 미장공, 벽돌공 등 닥치는 대로 일하고 금속회사도 다녔다. 노예 취급을 견디다 못해 공장에서 도망쳤다가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추방됐다. 그때는 임금이나 물가 차이가 워낙 커 한국에서 4년간 번 돈을 밑천으로 옌지에서 아파트와 땅도 사고 슈퍼마켓과 세차장 사업도 벌였다.
"경제적으론 풍족해졌지만 삶은 피폐해졌어요. 술에 빠지고 가정불화도 생겼죠. 80년대부터 선교차 중국에 드나들던 셋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를 매일 다녔죠. 거기서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 고조부 때부터 이어져온 신앙의 피가 작용한 것이기도 하고 셋째할아버지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하죠."
교회에서 새 삶을 얻었지만 그래도 목회자가 될 생각은 못했다고 한다. 성가대 지휘자가 자주 바뀌기도 하고 펑크를 내는 일도 잦아 그가 지휘를 맡겠다고 나섰다. 동북 3성에서는 마땅히 지휘를 배울 만한 학교가 없어 2000년 경기도 광주의 서울장신대 교회음악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전공인 지휘보다 교양과목으로 들은 신학에 더 흥미를 느껴 이듬해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장로회신학대로 다시 입학했다. 신학대학원까지 마치고 2013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08년 몽골에 전도 여행을 갔다가 2009년 울란바토르에 개척교회(예수사랑교회)를 짓고 후배에게 넘겨줬죠. 예수마을선교교회를 연 것은 2012년 7월입니다. 다른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시작했다가 지금의 자리에 간판을 달았죠."
다른 조선족 교회도 그렇듯이 이곳에 오는 신도들의 얼굴도 자주 바뀐다. 일용직 노동자가 많아 주일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기가 힘든 데다 이직도 잦고 비자 체류기간 때문에 몇 년 있다가 귀국하곤 한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신도는 60명 안팎이고 많을 때는 100명에 이른다. 오 목사는 모바일 메신저로 약 3천 명과 소식을 주고받는데, 몇 년이 지나 다시 교회를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한다.
십일조는 고사하고 헌금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신도가 적지 않다 보니 교회 살림은 늘 빠듯하다. 오 목사는 평일 아침저녁으로는 인력사무실 승합차를 몰고 노동자들을 출퇴근시켜주는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국내에는 조선족 목사가 100명가량 있다고 한다. 조선족목회자연합회에는 40여 명이 소속돼 있다. 중국에서 목회하다가 '양떼'가 한국으로 건너오니 따라온 '목자'도 있고, 오 목사처럼 한국에서 신학대를 나온 사람도 있다.
오 목사는 "한국의 목사 가운데 훌륭한 분이 많고 한국 교회의 프로그램이 잘 짜여 있으나 함께 전율하는 기쁨을 느끼고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기에는 조선족 목사가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기독교는 물론 종교 자체를 접해보지 않은 조선족이 많다. 또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대부분 교회에 오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여긴다.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지만 성경 구절을 듣자마자 스펀지처럼 금세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새벽별 보고 출근했다가 저녁달과 함께 퇴근하는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마음의 양식과 영혼의 위안을 갈망해온 겁니다. 인생의 목표가 뭐고 진정한 행복이 뭔지 곱씹어보게 만드는 생생한 사례가 주변에 차고도 넘치거든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가 허무하게 건강을 잃는다든지, 돈 때문에 불화가 생겨 화목했던 가정이 깨진다든지 하는 걸 보다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는 거죠. 부활하신 예수님이 희망입니다."
오는 16일은 부활절이다. 예수마을선교교회에서도 잔치를 열어 신도들이 노래와 율동을 뽐내고 세례식과 성찬식도 치른다. 계란을 나눠 먹으며 예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도 마련한다. 악기를 두루 다룰 줄 아는 오 목사도 모처럼 아코디언 연주를 선보일 작정이다.
오 목사는 자신의 집안을 비롯해 조선족들이 이주와 이산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선교의 씨앗을 뿌리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조선족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 선교하기가 어렵다고 탓하기보다는 전 세계를 무대로 이들을 선교의 도구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오 목사 자신도 '노마드(유목민) 인생'이라고 여겨 평생 여기서 살 수도 있지만 언제 옌볜이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될지 몰라 늘 보따리를 싸놓고 있다고 한다.
그는 교회 일과 부업에 여념이 없지만 지역의 공동체 일이나 교회 간 모임에 가급적 참석하려고 한다. 안산이 다문화 도시인 만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 자신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중국에선 소수민족이 많아서인지 각자의 방식대로 자유분방하게 사는 걸 누가 참견하지 않거든요. 여기선 단일민족으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인지 까다롭게 따지는 적이 많더군요. 조선족도 공중도덕이나 질서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모국 동포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교육을 덜 받고 순수해서 그렇지 조선족이 원래 무례한 건 아닙니다. 색안경을 벗고 포용하는 마음과 넓은 시야로 봐주기 바랍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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