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구포는 양산 땅" 목숨 걸고 지킨 사람들 있었다
양산시립박물관 '1874. 한양으로 떠난 세 사람 이야기' 특별전
(양산=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현재 부산 북구 구포동은 원래 경남 양산 땅이었다.
1869년(고종 6년) 양산군 구포면은 왕명으로 인근 동래부로 편입됐다.
부사(府使)가 다스리는 동래부는 군수(郡守)가 있는 양산군보다 더 높은 행정기구였다.
당시 구포면은 양산군 9개면 중 가장 큰 면이자 번영의 상징이었다.
조선 시대 영남 최대 조세 창고가 있을 만큼 물류와 상업이 발달했던 곳이었다.
경상권 내 육해공 생산물이 다 모이는 교역 요충지로 바다 건너 왜구는 물론 인근 동래부도 군침을 흘렸다.
양산 군민은 이 물 좋은 구포면이 동래부로 넘어가자 일제히 분개했다.
조정에 면을 돌려달라며 수차례 상서문(上書文)을 올렸지만 허사였다.
군민들은 급기야 우석규, 이기수, 서상노 세 사람을 특사로 뽑아 군민 여론을 임금에게 전달하려고 한양에 보냈다.
세 사람은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임금을 만날 수 없게 되자 죽기를 각오하고 남산봉수대에 올라서 봉화를 지폈다.
봉홧불이 오르자 도성은 전쟁이 난 줄 알고 발칵 뒤집혔다. 이들은 모두 체포돼 투옥됐다.
세 사람은 의금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봉화를 올린 사연을 밝혔다.
당시 영의정 이유원은 이들을 가상히 여겨 면책도록 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 봉화사건을 계기로 1874년 구포면은 양산군으로 귀속됐다.
양산 군민은 이 세 사람 공적을 후세에 기리려고 1875년 '구포복설비(龜浦復設碑)'를 세웠다.
이 세 사람의 고향 사랑은 지금도 양산향교에 비석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구포는 1904년 고종 황제 대한제국 당시 지금의 부산으로 편입돼 오늘에 이른다.
양산시립박물관이 11일 개관 4주년을 기념해 개막한 특별전 '1874. 한양으로 떠난 세 사람 이야기'가 바로 이 역사를 소개한다.
오는 6월 25일까지 열리는 특별전에서는 당시 구포를 지켜내려던 양산 군민들의 애향심을 모두 4부에 걸쳐 재조명한다.
1부는 조선시대 영남 최대 조세 창고였던 감동창(甘同倉)을 소개하고 낙동강 관문이던 구포의 경제적 중요성을 살핀다.
2부는 '구포복설상서문(龜浦復設上書文)' 12점을 통해 구포를 되돌려받기 위한 군민들의 치열했던 노력을 알린다.
'구포복설상서'는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3부는 대리천 둑을 쌓아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양산 군수 이유하와 구포에 남아 있는 역대 양산군수 업적을 전시했다.
4부는 구포가 다시 동래(부산)로 편입된 후 여전히 물류와 교통 중심으로 주목받던 구포 이야기를 보여준다.
신용철 시립박물관장은 "양산 시민 중에서도 구포가 옛 양산 땅인 줄 모르는 시민이 많다"며 "영남 물류 중심이던 구포를 둘러싼 양산 사람들의 애틋한 고향 사랑을 특별전에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choi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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