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자→온건개혁파…'카멜레온' 궤적 세르비아 새 대통령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3일 세르비아의 새 대통령으로 공식 당선된 알렉산다르 부치치(47) 총리는 발칸 반도의 극단적 인종주의자에서 세르비아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밀어붙이는 서방 친화적 온건 개혁파로 변모한 '카멜레온' 인생 궤적으로도 눈길을 끌고 있다.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수십 만 명이 사망하는 내전으로 몰고 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에서 정보부 장관을 지낸 부치치 당선자는 내전 당시 세르비아에 폭격을 감행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강력히 반발하고, 보스니아 무슬림,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발칸 반도의 타인종에 대해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던 인종주의자였다.
25세에 불과하던 1995년, 나토가 보스니아에 있는 세르비아 진지를 공습할 때 세르비아의 국회의원이던 그는 의회 연설에서 "세르비아인 1명이 죽을 때마다 무슬림 100명을 죽일 것이다. 공습을 해볼테면 해봐라"고 말하는 등 호전적인 발언을 일삼았다.
또, 밀로셰비치 정권 말기에는 정보장관으로서 억압적인 법 조항을 들이대며 수 십 개의 세르비아 독립 언론을 하루 아침에 문닫게 만드는 등 언론 탄압에도 앞장섰다.
2000년 밀로셰비치가 실각한 뒤에도 극우 정당에 가입해 전쟁 범죄자들의 체포에 항의하고, 서방과 각을 세우던 그는 2008년 친(親)서방 성향의 우파 정당 세르비아 혁신당(SNS)에 입당한 것을 계기로 극적으로 변모했다.
극우 인종주의자에서 온건한 개혁주의자로 탈바꿈한 그는 2014년 4월 총리가 된 뒤에는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위한 개혁 조치들을 이행하고 있다.
그는 이 같은 변신에 대해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하루 아침에 바뀐 것은 아니고, 단계적으로 변한 것"이라며 "과거에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점을 인정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내전 당시 서방의 제재로 경제가 황폐해진 세르비아에서 작년에 2.8%의 성장을 일구는 등의 적지 않은 성과로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한 끝에 손쉽게 대권까지 손에 쥐었다.
그렇지만, 11명이 난립한 이번 대선에서 그가 2위 후보의 3배가 넘는 55%의 압도적인 표를 얻은 것은 그에 대한 세르비아인들의 각별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코소보 등 주변국과의 갈등이 얽혀있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강력한 리더를 원하는 국민 정서가 작용한 덕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국가주의자들은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한 코소보와 관계 정상화 협정을 맺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노년층은 그가 이끄는 현 정부가 EU 가입을 위한 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연금을 10% 깎은 것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밀로셰비치 정권에서 행한 역할을 기억하며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고, 월 평균 임금이 330유로(약 40만원)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실업난에까지 허덕이고 있는 젊은 세대는 정치권 전반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며 냉담함을 유지하고 있다.
세르비아 내전 직전이나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이번 대선에서 기성 정치권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풍자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25세의 청년 루카 막시모비치에게 열렬히 환호했고, 그는 이 덕분에 9%의 표를 얻어 이번 선거에서 일약 3위로 올라섰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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