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최우선 아냐"…미국 중동정책 획기적 변화

입력 2017-04-03 15:47
"인권이 최우선 아냐"…미국 중동정책 획기적 변화

방미 이집트 대통령과 인권문제 공개 논의 안해

바레인에 인권개선 요구 해제…무기 수출 재개

(서울=연합뉴스) 정광훈 기자 = 미국 민주·공화당 역대 정부의 중동 정책 핵심 고려 사항인 인권 문제가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국익 우선, 안보 중시 정책에 뒷전으로 밀려나는 조짐이다.

미 백악관은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에 앞서 지난달 31일 발표한 성명에서 양국 정상이 안보·경제 문제를 집중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히면서 인권문제는 공개적 쟁점이 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와관련,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두 정상이 인권문제를 공론화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전하고, 공화·민주당 역대 대통령들이 고수해온 외교정책에서 확연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중동 정책 변화 움직임은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달 29일 반정부 활동가들과 다수파인 시아파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해온 바레인에 F-16 전투기 판매를 승인했다. 무기 판매 재개 전제 조건으로 그동안 내걸었던 시아파 주민 인권 개선 요구를 철회한 것이다.

이란의 중동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사우디 아라비아 등 수니파 국가들과의 결속을 위한 조치로 알려졌다. 바레인은 인구 다수가 시아파이지만 소수 수니파 왕정이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바레인은 미국의 핵심 우방일뿐 아니라 중동 해역을 관할하는 미 해군 5함대 모항이 있어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했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시리아 정책에도 수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달 30일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축출이 미국 정부의 중동 정책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시리아 내전이 아사드 정권의 민주화 시위 유혈탄압에서 촉발된 사실을 고려하면 대 시리아 외교정책에 획기적 변화를 예고한 셈이다.

트럼프 정부가 밀월 관계인 러시아의 대 시리아 정책을 고려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지만, 아사드 정권에 대한 전쟁범죄 단죄를 기대하는 국제사회 여론과는 동떨어진 결정이다.

미국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최근 터키 방문 기간에도 레젭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정부의 민주주의·인권 훼손 논란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독재로 향하는 에르도안 정부를 연일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과 동떨어진 태도였다.

NYT는 미-이집트 정상회담에서 인권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한 것이나 바레인에 인권 개선 요구를 철회하고 무기 판매를 승인한 것 등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들인 버락 오바마나 조지 W 부시와 달리 안보협력을 중동 정책의 초석으로 삼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오바마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이 모두 이집트의 인권을 개선하려는 열망과 국익 차원의 이집트 공개 지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고 2일 보도했다.

신문은 부시 전 대통령이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에게 민주개혁을 압박한 사실을 지적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집트 보안군이 2013년 카이로에서 시위대 800여 명을 사살하고, 당시 군 장성이었던 엘시시가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하자 이집트에 대한 무기 수출을 일시 중지했다.

엘시시 정권 출범 후 이집트에서는 고문 등 인권유린이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수만명이 투옥됐다. 백악관 관리들은 밀수와 아동학대죄로 수감된 이집트계 미국인 아야 히자지 등 여러 미국인 수감자들의 신병 관련 문제도 정상회담에서 공식 거론되지 않을 것임을 내비쳤다. 3년 가까이 수감된 히자지에 대한 혐의는 대부분 날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WP에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법은 이같은 민감한 문제들을 비공개적으로, 좀 더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라며 "우리는 그것이 바람직한 결과로 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집트 정상으로는 2009년 이후 처음으로 백악관을 방문하는 엘시시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은 인권침해 전력으로 오랫동안 냉대받아온 이집트 지도자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성격이 다분하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엘시시 정부가 민주개혁 세력과 무고한 시민들을 계속 탄압하도록 묵인하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트럼프 미 정부나 이집트 정부 모두 이집트 인권 개선에는 당장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트럼프 정부가 엘시시를 백악관으로 초청한 것은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정책의 급속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barak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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