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은 어떻게 민영익을 살렸나…화폭에 담긴 근대의학사

입력 2017-04-03 06:11
알렌은 어떻게 민영익을 살렸나…화폭에 담긴 근대의학사

세브란스병원, 역사적 순간 담은 역사기록화 13점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1884년 갑신정변으로 크게 다친 민영익(1860∼1914)은 미국 공사관 소속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의 치료로 생명을 건졌다.

조정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올렸다. 한국 근대의학은 이듬해 탄생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에서 시작됐고,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따르면 한국에 서양식 의술이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한 이 역사적 치료 장면을 비롯해 세브란스 132년 역사의 주요 순간들이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첫 작품은 단연 알렌 박사의 민영익 자상(刺傷) 치료 순간이다.



민영익은 조정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겨졌지만, 어의(御醫)들이 칼에 깊숙이 찔린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다. 그러자 묄렌도르프가 불러온 알렌이 지혈과 봉합치료로 민영익을 살렸다.

알렌은 이후 서양 의술에 감명받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안했다. 그 결과물로 1885년 4월 10일 제중원이 개원할 수 있었다.

'한국인보다 더 많이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가 1892년 9월 29일 캐나다 토론토대 강연에서 조선의 엄혹한 현실을 알리며 의료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장면도 그림으로 재현됐다.



토론토대 의대·약대 교수였던 올리버 에비슨은 이 강연을 듣고 감명받아 선교사로 부산항에 발을 디뎠다. 에비슨은 제4대 제중원 원장이 됐고, 1904년 미국 사업가 루이 세브란스의 기부를 받아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로 바꿨다.

에비슨의 1893년 6월 16일 부산 도착 장면, 1900년 4월 30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있었던 에비슨과 세브란스가 만나는 장면도 그려졌다.

의학사를 넘어 한국 근대사의 변곡점이 된 순간들도 화폭에 담겼다.

1907년 일제 통감부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이 일본 군경과 시가전을 벌여 부상자 수백 명이 발생하자 세브란스가 치료에 나섰다.

많은 수의 부상병이 몰려 남녀 가릴 것 없이 치료가 이뤄졌다. 남녀유별 관습에 따라 여자 간호사가 남자 환자를 돌보기 어려웠던 인습은 이때 허물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만세 시위에 나선 세브란스 학생들이 병원 해부학 실습실에 독립선언서와 관련 증거들을 숨기는 장면, 1945년 해방 이후 귀환 동포를 구호하는 세브란스 학도대의 모습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해방 직후 세브란스의학교는 서울역 앞에 있었다고 한다. 징용·징병 된 동포들이 돌아와 헐벗고 굶주린 채 학교 주변을 떠도는 것을 목격한 학생들은 서울역 앞에 구호소를 차리고 이들을 진료했다.

기록화 중 최근의 내용을 다룬 것은 1960년 4·19혁명에 나선 연세대 의대생의 모습이다.

당시 시위에서 의예과 2학년이던 최정규 씨가 경찰 총탄에 숨졌다. 최씨는 이후 명예 의학사 졸업장을 받았다.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은 다시 '부상 병동'됐다. 그때 기초의학 교수는 물론 학생들까지 총출동해 부상자를 돌봤다고 전해진다.

역사기록화는 2015년 8월 사업 추진이 결정됐다. 연세대 의대 의사학(醫史學)과 여인석 교수의 고증과 검토를 거쳐 재미 화백 김건배 씨가 올해 1월 유화 13점을 완성했다.

병원 관계자는 "역사기록화는 사진으로 남지 않은 과거 순간의 정황과 의미를 후세에 전하려는 게 목적"이라며 "근대의학이 국내에서 태동한 세브란스의 역사와 나아가 한국 근대의학사 발전을 길이 남기고자 1884∼1960년 사이의 일들을 그리는 사업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역사기록화는 연세 창립 132주년, 연희-세브란스 통합 60주년을 기념해 오는 5일 세브란스병원 종합관 4층 전시관에서 공개된다.

j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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