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소비] "20만원짜리 클래식 면도기 산 뒤 자부심 느껴요"

입력 2017-04-03 06:11
수정 2017-04-03 07:24
[마니아 소비] "20만원짜리 클래식 면도기 산 뒤 자부심 느껴요"

'취향을 소비한다' 덕후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트렌드

전문가들 "성숙한 시장서 자연스러운 현상…취향 존중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평범한 직장인 안모(36)씨 집은 구석구석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서재에는 다스베이더 등 다양한 종류의 피규어(캐릭터 모형)들이 장식장을 채우고 있고, 한쪽에는 게임 소프트 수십 개가 꽂혀 있다.

결혼 후 산 것만 피규어가 200만원, 게임 소프트가 200만원 가량 될 것으로 안씨는 추정했다.





다른 방에는 운동하려고 88만원을 주고 산 로잉머신이 놓여 있다.

그 옆에는 키우는 고양이를 운동시키려고 구매한 20만원짜리 캣휠이 있지만 안씨도 고양이도 마지막으로 언제 운동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캠핑용 텐트가 4개, 백팩이 1개 있는데 몇 달 전에 신제품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이유로 백팩 40만원짜리를 또 샀다.

캠핑 가서 가족사진을 찍으려고 80만원짜리 DSLR 카메라도 샀지만 1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한다.

중고로 340만원에 산 오디오용 진공관 앰프는 안씨의 최고 애장품이다.

"물건을 살 때마다 혼내는 아내가 유일하게 칭찬하고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라며 "소리가 정말 좋다"고 안씨는 자랑했다.





가장 최근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클래식 면도기를 샀다. 거품 내는 비누와 브러시, 날까지 20만원을 줬다.

안씨는 "일단 몰래 산 뒤에 그 물건이 요긴하게 쓰일 국면에 슬쩍 꺼내 아내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독록 하는 게 내 전략"이라며 "'필요가 없는 걸 산 적은 있어도 좋지 않은 걸 산 적은 없다'는 것이 내 자부심"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취향을 소비로 표현하는 '위너 소비자', 일명 '덕후(마니아)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덕후 소비자'들은 게임·완구·만화 등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제품들과 컴퓨터·오디오·카메라 등 IT기기에 돈을 아끼지 않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소비를 이어간다.

안씨처럼 다양한 취향을 지닌 이도 있지만, A(36)씨처럼 특정 물품에 특화한 '덕후'도 있다.

지금까지 A씨의 손을 거쳐 간 키보드는 10여 개 정도로, 가격도 비싼 것부터 저렴한 것까지 천차만별이다. 남들이 볼 때는 똑같은 키보드이겠지만, A씨에게는 하나하나가 전혀 다르다.

아주 미묘하게 다른 키의 감각을 위해 수십만원을 지출해 해피해킹, 리얼포스 등 고가의 일본 키보드를 사는가 하면 20년 전 단종된 희귀 키보드를 사고 싶어 이베이를 들락날락하기도 했다.

지금 사용하는 해피해킹의 정전용량무접점 방식 키보드는 기계식 키보드의 '끝판왕'으로 '청축', '갈축', '흑축 '등 여러 종류의 기계식 키보드를 직접 사용해 본 후 골랐다.



주변에서 이러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A씨는 개의치 않는다.

A씨는 "하루에 가장 오랜 시간 내 몸과 접촉하고 있는 물건이므로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좋은 만년필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시장이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덕후 소비는 한 영역을 깊이 파고들어갈 시간과 열정, 정보수집능력, 자본 등이 갖춰져야 나타날 수 있다"며 "또 그런 사람들이 여러 명 있어 서로 소통하고 결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이 적은 선진시장에서 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전 위원은 "불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매자에게 기쁨을 준다는 측면에서 그 제품 나름의 효용이 있는 것"이라며 "성숙한 시장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자기 나름의 취향을 소비로 연결한 것이니 존중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kamj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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