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극에 발목잡힌 김정남사건…北소행 심증만 굳히고 미제될듯

입력 2017-03-30 22:01
수정 2017-03-30 22:41
인질극에 발목잡힌 김정남사건…北소행 심증만 굳히고 미제될듯

北용의자 모두 평양행, 말레이수사 마무리 수순…배후규명·주범처벌 물건너가

(하노이=연합뉴스) 김문성 특파원 = 전 세계의 이목을 끈 김정남 암살 사건의 배후 규명과 주범처벌이 사실상 물 건너갔다.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인질 외교'의 해법으로 결국 타협책을 선택하면서 이번 사건이 영구미제로 남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북한이 30일 자국 거주 말레이시아 국민의 출국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말레이시아는 북한에 김정남 시신을 인계하는 동시에 북한 국적 용의자들의 출국을 허용해 수사가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관측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국제공항에서 살해되고 북한 국적자들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북한 정권 배후설이 급부상했다.

북한 정부에 비판적인 김정남이 평소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화학무기인 VX가 살해 도구로 쓰인 것으로 드러나자 국가 차원의 범죄에 무게가 실린 것이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실명까지 포함해 공식적으로 발표한 용의자는 총 10명이다. 이 중 8명은 북한 국적자이고 2명은 외국인 여성이다. 할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몇 명 더 추적 중인 인물이 있다"며 이들 외에 용의자가 더 있음을 공개했다.

그러나 재판정에 선 용의자는 2명의 외국인 여성뿐이다.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29)과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가 김정남 얼굴에 독극물을 묻혀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 지난 1일 재판에 넘겨졌지만,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이들은 김정남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 영상이나 TV 쇼를 찍는 것으로 알았다고 주장하는 '조연'에 불과하다.





핵심 용의자인 리지현(33), 홍송학(34), 오종길(55), 리재남(57) 등 4명은 범행 직후 평양으로 도피해 말레이시아 경찰의 손을 떠났다. 사건 초기 체포된 리정철(46)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 북한으로 돌아갔다.

남은 용의자는 현광성(44)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북한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 리지우(30) 등 3명으로, 모두 치외법권 지역인 북한대사관에 숨어있었다.

현지 경찰은 이들의 수사 협조를 북한 측에 요구했고 26일에야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진술을 받았다. 그러나 진상 규명이나 처벌이 아닌 사건 봉합 수순으로 풀이됐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이 인질 외교 협상을 통해 이들 용의자 조사 후 출국 보장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주범들의 신병은 단 한 명도 확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가 "경찰 수사는 계속될 것"이라며 "모든 가능한 방안을 동원해 이번 살인사건의 책임자들을 재판에 넘길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지만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대부분의 북한 국적 용의자가 북한 외무성이나 보위성 소속으로 흐엉과 아이샤를 데리고 캄보디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예행연습을 한 점, 리지현은 리홍 전 주베트남 대사의 아들로 흐엉을 포섭한 베트남 전문가인 점 등 여러 정황을 볼 때 북한 정권의 조직적 범죄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를 뒷받침할 진술과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또 말레이시아가 김정남 시신을 북한에 넘겨줌에 따라 김정남이 아닌 여권상의 '김철'이 심장질환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북한으로서는 '증거 인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맹독성 신경작용제 VX의 출처를 조사해 배후를 밝히는 방법이 있지만, 아직 경찰 수사에서 드러난 것이 없다. 북한이 보안이 보장되는 외교행낭을 통해 VX에 반입했을 가능성이 거론되는 수준이다.

한국 정부는 VX가 유엔이 금지한 화학무기로, 북한을 비롯한 일부 국가만 보유한 점을 들어 김정남 암살의 배후로 북한 정권을 지목하고 국제무대에서 대북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북한은 모든 관련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이번 사건 발생 초기만 해도 말레이시아는 북한의 '수사 방해'에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한이 인질 외교까지 촉발하며 '더는 잃을 게 없다'는 식으로 나오자 말레이시아가 자국민 안전을 위해 북한에 무릎을 꿇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kms123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