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두환 "노태우가 나에게 직선제 반대하는 모습 연출하라 요구"
전두환이 밝힌 6·29 비화…"국민 속이는 위선적 처사" 거부
6·29선언 前 마지막 전·노 만남에 전재국 배석…밀사 역할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전두환 전 대통령은 6·29 선언을 준비할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직선제 개헌을 건의할 테니 크게 노해 호통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었다고 증언했다.
이는 노 전 대통령이 직선제를 비롯한 민주화 조치를 극적으로 수용하고 이에 반대하는 전 전 대통령에 강력히 반발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최대한 높이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전 전 대통령의 주장이다.
전 전 대통령은 30일 연합뉴스가 단독 입수한 『전두환 회고록』2권 '청와대 시절'에서 6·29 선언 비화를 소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5공 관계자들이 6·29 선언과 관련한 뒷이야기를 전한 적은 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접 6·29선언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 직접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1987년 6월17일 오전 10시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 전 대통령을 청와대 집무실로 불렀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상황에 대해 "나는 마주 앉은 노태우 대표에게 먼저 긴 설명 없이 국민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직선제 수용을 전제로 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기술했다.
그러자 노 전 대통령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언지하에 반대했다고 전 전 대통령은 밝혔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직선제 개헌에 반대했다는 것.
첫째 민정당이 4·13 조치에 따라 호헌을 주장해오다 당론을 바꿔 지금까지 내각책임제의 장점을 홍보해왔는데 이제 다시 직선제를 받는다고 하면 민정당 내부를 설득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두번째는 직선제 아래서 과연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훗날 생각해보니 당시 노 대표는 '전 대통령 자신은 간접선거를 통해 쉽게 대통령이 됐으면서 나더러는 떨어질지도 모르는 직선제를 하라는 거냐'하는 생각에서 반발심을 드러냈던 것으로 짐작됐다"고 적었다.
전 전 대통령은 직선제로 해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틀 뒤 6월19일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별관에서 다시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 수용 지시를 따르겠다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 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하고 전 전 대통령이 크게 노해 호통치는 그림을 연출해달라는 것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상황에 대해 "노 대표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다.
전 전 대통령은 고심 끝에 노 전 대통령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6월22일 그를 다시 청와대로 불렀다.
전 전 대통령은 "나더러 반대해달라고 한 것은 없던 일로 하자. 그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고 위선적인 처사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데 나중에 진실이 알려지면 훗날 나와 노 대표를 국민이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며 노 전 대통령을 타일렀다고 했다.
전 전 대표는 그날 오후 청와대에서 윤보선, 최규하 전 대통령을 만났다. 두 전직 대통령에게 개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4·13 호헌조치를 거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24일 오전에는 김영삼 민주당 총재를, 오후에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이만섭 국민당 총재 등 야당 대표와 연쇄회동을 가졌다. 야당 지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전 전 대통령은 "김영삼 대표와는 점심까지 같이하며 3시간을 만났는데 대화 중 김대중씨를 언급하며 출신지역을 거론했다. 나는 그 말은 못 들은 듯이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고 당시 일을 회고했다.
이날 저녁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을 다시 불러 청와대 별관에서 만찬을 함께 하며 노 전 대통령에게 6·29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는 "6·29 선언의 성공을 위해 노 후보가 구상하고 주도하는 정치적 제안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파격적인 조치라 하더라도 모두 받아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적었다.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6·29 선언 전 27일 청와대 별관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장남 재국씨만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자필로 써온 발표문을 낭독했다고 전 전 대통령은 기술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 최종 결론이 났으니 최대한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 청와대나 안가에도 오지 말고 예상치 못한 급한 일이 생기면 우리 큰애를 통해 서면으로 연락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재야에 밀리는 상황에서 발표하면 빛이 나지 않으니까 민헌국(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 주최하는 대행진 행사의 추이를 지켜보고 일요일인 28일을 하루 더 지켜본 뒤 조용하게 되면 29일 극적으로 발표하라고 지시했다"고 덧붙였다.
제6공화국의 문을 연 6·29 선언의 발표일은 이렇게 정해졌다고 전 전 대통령은 증언했다.
kind3@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