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과 비극, 주연과 조연 오가는 삶에 대한 은유"
오현종 소설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살아가다 보면 내가 주연일 때도 있고 조연일 때도 있죠. 비극의 주인공이나 희극의 주인공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소설 안에 희로애락이 있잖아요. 제목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아우르는, 삶 자체에 대한 은유입니다."
작가 오현종(44)이 소설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문학동네)를 냈다. 작가가 그동안 학원물부터 무협소설까지 장르적 장치를 자유자재로 차용해온 탓에, 10년 만에 엮은 이번 소설집에선 자전적 요소가 담긴 담백한 작품들에 우선 눈길이 간다.
맨 앞에 실린 '부산에서'는 대학 강의를 위해 1년간 부산에 내려가 생활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다. 화자는 연구년을 맞아 유럽으로 떠난 한 교수의 아파트를 빌려 살면서 교수의 강의 빈자리를 채운다. 집에서도 책으로 가득 찬 서재에서 잠을 청할 정도로 작가로서 자의식이 강한 그에게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이는 "소설의 시대는 이제 갔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화자는 이런 모욕감이 새삼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소설가가 맞기는 하는지 스스로 되묻는다.
"예전에는 문학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해야 하는, 종교와도 같았어요. 지금은 내가 욕망하는 만큼 문학이 따라와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어요. 여전히 저를 힘들게 하지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1999년 등단한 작가는 지난해까지 10여 년 동안 시간강사로, 계약직 강의전담교수로 일터를 옮겨 다녔다. '호적을 읽다'에서도 소설가로서 자괴감을 언뜻 내비치지만 삶이 부여한 역할을 수용하는 마음가짐도 엿보인다. 미국 비자 발급을 준비하던 화자는 몇 해 전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신용카드 발급을 거부당한 일을 떠올린다. 뉴스에서는 앞으로 비자를 받지 않아도 미국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화자는 이제 필요 없어져 버린 호적등본을 들여다보며 가족 내 여성의 삶을 되짚는다.
허염조(許念祚). 할머니의 이름이 심덕이나 끝순이였다면 삶은 다른 모습이었을까. 복을 생각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할머니는 소녀 시절 신문사 신춘현상문예에 산문이 당선된 적이 있었다. 소설가로서 화자의 삶은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운명 같은 것일 수 있다. "내 삶도 건조하고 간단한 기록으로 요약된다는 사실이 깊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할머니의 삶도, 아주 멀리 있는 그의 삶도 결국에는 몇 줄로 남은 채 바스러질 시간이란 사실 또한."
표제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는 제 뜻과 상관없이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듯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읽힌다. 결혼을 한 달 앞둔 남녀가 잠에서 깨어보니 밀실에 감금돼 있다. 손가락을 문밖으로 내어놓으라는 쪽지까지 받는다. 하지만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지 감도 잠을 수 없다. 밀실에서 빠져나가려는 노력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엔 연극적 요소가 짙다.
작가는 그러나 "운명론자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 "예전에는 세상과 충돌하는 면이 많았지만 나이를 먹고 소설을 써가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좀 더 수용할 수 있게 됐어요. 문학을 한다는 건 어떤 성취일 수도 있지만 그걸 넘어서면 나 자신과 세계가 화해하는 지점이 돼요. 세상과 삶에 손을 내밀 수 있게 된 순간들을 소설적으로 포착하고 싶었습니다." 228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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