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해·서정연·엄효섭…연극이 배출한 보석같은 조연들
지독한 생활고 속에 연마한 '묵은 연기'로 전천후 배역 소화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알토란 같은 배우들이 TV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그중 현재 가장 눈에 띄는 배우가 김원해, 서정연, 엄효섭. 이들은 방송 3사 드라마를 종횡무진 누비며 보석 같은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공통점은 '연극배우 출신답게' 지독한 생활고를 견디며 오랜 시간 연기를 연마했다는 점이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드라마에서 어떤 옷도 너끈히 소화하는 실력을 발휘한다.
◇ '김과장'·'힘쎈여자 도봉순'의 김원해
연극배우들이 대개 '대기만성'형이지만, 김원해(48)는 그중에서도 늦게 꽃을 피운 듯 하다. 하지만 '늦바람이 무섭다'(?)고 아주 활짝 꽃이 피었다.
김원해는 지난해 '시그널'을 시작으로 '혼술남녀' '화랑'을 거쳐 현재 '김과장'과 '힘쎈여자 도봉순'에 동시 출연 중이다. 영화도 대여섯편 출연했고, 광고도 찍었다.
50년 가까운 인생에서 지난 2년이 아마 최고로 '호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울예대 졸업 후 1991년 뮤지컬 '철부지들'로 연극무대에 데뷔한 김원해는 1997년 뮤지컬 '난타'에 입문하며 꼬박 10년을 보냈다. 하지만 2008년 연기를 그만두고 김밥집을 차렸다. '무명배우' 20년 만에 포기한 것이다.
김원해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돌아보며 "서른아홉인데 그렇게 열심히 연기했는데도 수중에 가진 게 없더라. 그쯤 했으면 내 손에도 뭔가 쥐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모든 게 허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극쟁이'가 장사를 하는 것은 더 어렵다. 전재산을 털어 차렸던 김밥집을 1년 만에 '말아먹고' 그는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인생의 전환기는 2014년 찾아왔다. 감초 역할로 출연한 영화 '명량'과 '해적'이 잇따라 대박 나면서 그는 지금껏 줄곧 상승세다.
특히 '김과장'에서 맡은 경리부장 추남호 연기는 매회 심금을 울리고 있다. 부스스한 차림부터 행동 하나하나 추레한 회사원 기러기 아빠를 손에 잡힐 듯 표현해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더불어 직원들을 마음으로 대하는 추부장의 선한 모습이 감동을 준다.
◇'쇼핑왕 루이'·'초인가족'의 엄효섭
엄효섭(51)은 바쁜 와중에 캐릭터의 폭이 광범위하다는 특징이 있다.
지난해에만 다섯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고, 현재도 네 작품을 동시 촬영 중인데 캐릭터가 다 다르다. 선택되어지는 조연이 이렇게 폭넓은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심지어 드라마 출발이 잔인무도한 연쇄 살인마 역이었는데, 이번엔 이보다 웃길 수 없는 촌철살인 코미디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리멤버 아들의 전쟁'에서는 악독 검사, '마스터 국수의 신'에서는 탐욕스러운 국회의원, '닥터스'에서는 '파파보이' 병원원장, '쇼핑왕 루이'에서는 재벌가 코믹한 집사를 각각 연기했다.
현재는 '초인가족'에서 세상일에 통달한 샐러리맨 최부장을 맡아 핀셋으로 집어낸 듯한 절묘한 웃음을 선사한다.
서울예대 출신인 그도 대학로에서 생활하면서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트럭을 몰고 다니며 꽃과 배추 등을 팔았다. 롯데월드가 개장하면서 퍼레이드 공연팀에 8개월간 '취직'도 해봤다. 배우 조성하가 그 시절을 함께 견딘 30년 지기 친구다.
하지만 '연봉 300만원'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결국 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술을 배워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그때 기회가 왔다. 2006년 영화 '로망스'에 캐스팅되면서 인생 항로가 바뀌었고, 이후 지금껏 안방극장을 누비고 있다.
엄효섭은 최근 인터뷰에서 "연극 쪽 배우들이 잘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연기에 매진하는 연극배우들은 늘 준비돼 있다"며 "좋은 인재들이 많은 만큼 기회가 더 열리길 바란다"고 밝혔다.
◇'피고인'·'김과장'의 서정연
월화에는 '피고인'에서 정신과의사로, 수목에는 '김과장'에서 대기업 상무로 출연한 서정연(46)은 연극 출신 여배우 중 단연 눈에 띈다.
1996년 대학로에서 연기를 시작한 그는 20년 '묵은' 베테랑이지만 '초 내성적'인 성격 탓에 첫 드라마 오디션 때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했다.
2012년 드라마 '아내의 자격' 오디션이다. 이때 안판석 PD의 눈에 띄어 '밀회'와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세 작품 연속 캐스팅됐지만, 서정연은 또다시 '초 내성적'인 성격 탓에 TV드라마를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 고비를 넘긴 그는 '태양의 후예', '구르미 그린 달빛' 등의 히트작을 거쳐 최근 세 편의 드라마를 동시 촬영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서정연도 한때 연기를 포기했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도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백화점과 동대문 시장 판매 아르바이트, 의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표준환자 역할 아르바이트도 했다. 홈쇼핑 쇼호스트 면접을 봤고, 성우가 돼볼까 해서 MBC아카데미 성우과정을 다녔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서른아홉에 연극판을 떠나 1년간 회사원 생활을 했다.
서정연은 최근 인터뷰에서 "회사에 다니니 걱정은 사라졌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극을 할 때는 행복했고 만족감이 컸는데 그런 게 없었고 결국 1년 만에 연극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돌아온 그는 기회를 잡았고,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서정연은 "가난했지만 연극 생활 20년이 하나도 후회되지 않는다. 너무 행복했다"며 웃었다.
그는 "연극을 하면 내면에 쌓이는 게 있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연극을 계속하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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