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아들 안필영 옹 "최초의 한인촌이 후세에 기억되길"

입력 2017-03-24 14:01
수정 2017-03-24 14:27
도산 아들 안필영 옹 "최초의 한인촌이 후세에 기억되길"

"의미있는 공동체…독립운동하던 선조들이 있었던 곳"

(리버사이드<미국 캘리포니아주>=연합뉴스) 옥철 특파원 = "도산 선생이 저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이곳 커뮤니티가 후세에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라겠습니다."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막내아들인 랠프 안(91·한국명 안필영) 옹은 한동안 감회에 젖었다.

2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동남부 소도시 리버사이드에서 열린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 현판식에 참석한 그는 어려서 아버지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단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곳이 분명히 첫 번째 한인촌이 맞다"고 단언했다.

또 리버사이드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 펼쳐졌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교회도 있었고 애국적 회합도 있었다고 한다.

도산 선생은 배움이 필요하다는 열망을 안고 1902년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르다 1904년 리버사이드로 내려왔다.

이곳은 원래 1880년대 중국인 노동자들이 산타페이 철도를 건설하던 현장이었다. 파차파 캠프 인근에도 철도가 지나간다.

중국인들이 떠나간 뒤 한인 50여 명이 이곳에 정착해 파차파 캠프를 세웠다. 오렌지 농업이 번창하면서 한인들이 인부로 고용됐다.

네이블 오렌지가 들어오면서 리버사이드가 한때는 미국 내에서 가장 부촌으로 꼽히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안 옹은 "당시 정착하던 무렵에는 (한인들에게는) 돈도 전혀 없었고 영어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매우 살기 어려웠던 시기"라며 "매일 기차를 타고 오렌지를 따러 나가야 했다. 그마저도 1920년 이후에는 오렌지 수확 실패로 한인들이 LA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억했다.

강명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은 1911년 파차파 캠프를 찾아 이곳을 '도산공화국'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안 옹은 "당시 일제는 한인들을 매우 경계하며 감시하던 시기가 아니었겠느냐"고 돌아봤다.

안 옹은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 한인들이 최초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이전에 국제사회를 설득시키기 위해 일본 외무성과 경쟁을 해야 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안 옹은 부친의 뜻을 기리는 사적지 지정을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곳이 잊히지 말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나야 이제 나이 아흔이 넘었는데 뭘 더 할 순 없지 않겠느냐. 우리 후손들이 이 커뮤니티를 잊지 않길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oakchu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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