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참새방앗간] 헤어스타일 메시지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가출'해 '거리'로 나온 앤 공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 것이었다.
우연히 만난 이발사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싹둑 잘라냈고, 예쁜 손님과 자신의 솜씨가 빚어낸 앙상블에 못내 흡족해했다.
이후 또다시 우연히 재회했을 때 이발사는 주머니에 상비한 빗을 꺼내 공주의 앞머리를 살짝 정돈해주기도 했다.
1953년 세상에 나온 영화 '로마의 휴일' 속 이야기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앤 공주의 이 같은 헤어스타일은 이후 '헵번스타일'로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럽 어디 작은 나라 공주로 설정된 앤 공주는 하루 동안 거리 세상을 신나게 체험했고 자유를 만끽했다. 짧은 쇼트커트의 헤어스타일은 앤 공주의 커다란 변화를 상징했고, 앤 공주와 영화 관객의 사이를 순식간에 바싹 좁힌 장치가 됐다.
성형이 편의점 드나들듯 쉬워진 세상이지만, 사람의 인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변화시키는 것은 헤어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여자들이 심경의 변화를 느낄 때 미용실을 찾는다고 하지만, 헤어스타일의 중요성과 의미에서 남녀가 유별하지 않다.
군대 갈 때 삭발하면서 울컥하지 않는 남자 없고, 이제는 남자아이들에게도 '미용'을 위해 파마를 시키는 게 흔한 일이 됐다.
2004년 개봉한 '효자동 이발사'는 1960~70년대 청와대 인근 효자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순박한 이발사의 이야기다. 그가 어느날 청와대에 불려가 대통령의 머리를 깎는 청와대 이발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이 격동의 실제 역사와 맞물려 그려졌다.
서슬 퍼렇던 시절, 대통령 각하의 '용안'에 면도칼과 가위를 들이대야 하는 주인공 이발사는 진땀 뻘뻘이다.
이 영화 속 대통령은 늘 같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했다. 군대식 깔끔한 스타일. 이발사는 그 규격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다.
헤어스타일은 자존심이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평생 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할 수도 있고, 늘 변화무쌍한 모습을 연출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머리 모양은 그 사람의 성격과 심경을 대변한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가 있다. 드라마에서도 등장인물의 심경과 신상에 변화가 생길 때 가장 먼저 변화하는 게 헤어스타일 아니던가.
요즘 삼성동에 사는 어떤 분의 헤어스타일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 나오는 대통령과 연관된 분이다. 청담동의 미용사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출장'을 다녀간다고 해 '뉴스'다.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단단한 자존심도 알겠다.
하지만 세상이 뒤집혔다. 그 격변의 원인 제공자가 홀로 조금의 미동도 없는 모습이다. 국민이 입은 상처는 누가 어루만져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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