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부모들은 왜 세계문학전집을 샀을까

입력 2017-03-22 10:44
1960년대 부모들은 왜 세계문학전집을 샀을까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1960년대는 전집의 시대였다.

1958년과 1959년을 기점으로 쏟아져 나온 전집류는 컬러 인쇄와 금박 글자 등을 내세운 호화 양장본으로 일반 단행본보다 훨씬 비쌌다.

1962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60권의 가격은 2만5천원. 도시 근로자 월평균 가계 소득이 6천원 남짓하던 시절이었다.

부모들은 없는 형편에도 할부를 이용해 전집을 사들였다. 그렇게 사들인 전집은 텔레비전 옆에 멋지게 자리 잡았다.

종이가 부족해 교과서 인쇄도 힘들다던 시절, 왜 그렇게 전집이 유행했을까.

국문학자 박숙자씨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세계문학전집의 위력에 눈뜬 부모들에게 '우리에게도 세계문학전집이 있다'는 유혹은 떨쳐버리기 어려웠다"면서 "세계문학전집은 처음부터 '읽기'를 전제한 책이 아니라 장서용 도서로 기획된 책"이라고 말한다.

그는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푸른역사 펴냄)는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청년들이 읽은 책을 통해 그 시절의 문화사를 읽어낸다.

형의 책장에 꽂혀있던 세계문학을 읽으며 국가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청년 '준'부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공장 직공 청년 '태일'까지 다양한 청년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해방 이후 전쟁 때 쓰던 엔진을 재활용한 미제자동차 '시발택시'가 누비던 시대, 책의 대세도 일서(日書)에서 양서(洋書)로 바뀌었다. 명동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책들이 넘쳐났다.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속 선영은 미군 댄스홀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나 화려한 눈앞의 광경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도록 황홀"했다. 미국은 행복함의 현실적 이미지 그 자체였다.

한글로 된 출판물 자체가 귀했던 시절에는 해적판과 복사본이 판을 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빙점'이다. 미우라 아야코, 우리에겐 '삼포능자'(三浦陵子)로도 익숙한 작가의 '빙점'은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에 연재 중이었지만 저자의 허락도 없이 한국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4·19로 시작된 혁명의 시대, 60년대에는 학생들이 잡지 '학원'과 '사상계'를 읽었다. '학원'은 중학생 종합잡지였으나 사실상 중고등학생의 전국 포럼 같은 역할을 하며 10만부를 찍었다. 김승옥, 전상국, 조해일, 이제하, 황석영, 황동규, 마종기 등 전국의 글 좀 쓴다는 학생들이 학원에 글을 실었다. 또 당시 등장한 '홈룸'(Home Room), 일명 '에이치. 아르'(H.R.)란 이름의 학급회의는 초보 단계의 민주주의 제도를 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1970년대 출판계에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일종의 '블록버스터'급 사건이 발생한다. 1975년 삼중당문고의 발행이었다. 학생 회수권이 25원, 짜장면 한 그릇이 150원 정도 하던 시절 권당 200원인 삼중당문고는 전집 할부의 부담에서 벗어나 가난한 고학생들도 가질 수 있는 책이었다.

삼중당문고는 '내 것'이라는 만족감, 친근감을 줬다. 동시에 내용이 뭔지 모르고 읽더라도 최소한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외부에 드러내는 역할을 하며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자유대한'에서 '유신체제'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으며 꿈꾸며 살던 청년들의 삶을 담아냈다"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기 위해, 그리고 길 없는 길을 가기 위해 이들이 붙잡을 것은 책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60쪽. 1만4천900원.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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