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진출했다 범죄자몰린 한국 유망첨단기업인 사연…"억울하다"

입력 2017-03-22 09:41
美 진출했다 범죄자몰린 한국 유망첨단기업인 사연…"억울하다"

한국터보기계 이헌석 대표, 단순 표기실수에 사기혐의 '억지기소' 주장

美검찰 뒤늦게 사기혐의 삭제…변호인 "기소변경은 한미범죄인인도조약·美헌법 위반"

(시카고=연합뉴스) 김 현 통신원 = 한국의 유망 첨단기술업체 대표가 미국에 호기롭게 수출했다가 졸지에 범죄자로 몰려 2년째 '사고무친' 시카고에서 미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법정싸움을 하고 있다.

고성능 송풍기와 압축기 개발로 혁신 기술력을 인정받고 업계의 주목을 받던 한국터보기계주식회사(KTURBO) 이헌석 대표(51)는 21일(현지시간) 연합뉴스에 "일부 수출 제품의 단순표기 실수가 미국 정부 상대 사기 혐의로 부풀려져 억울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1997년 충북 청원에 한국터보기계를 설립해 첨단 고성능 터보기계를 개발, 과학기술부장관이 수여하는 이달의 엔지니어상·대한민국 기술대전 대통령상·1천만불 수출의 탑 등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하던 이 대표는 2009년 미국에서 성사시킨 수출 계약 건에 발목이 잡혔다.

미국의 6개 건설사와 정부사업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시카고 교외에 설립한 공장을 통해 고성능 송풍기 수출을 추진하다가 2010년 말 선적 제품에 붙은 '미국 내 조립'(Assembled in USA) 표기가 빌미가 돼 미국 연방 검찰에 '경기부양법(ARRA) 위반 사례'로 걸렸고, 해당 제품을 전량 압류당했다.

이 대표는 "'미국 내 조립'이라는 표기를 '원산지 표시 위반'으로 보더라도 세관이 내릴 '시정 명령' 대상이지 범죄가 아니며, 경기부양법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 대표는 그걸로 마무리된 줄 알았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미 검찰은 2012년 이 대표를 '연방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상대 사기 미수' 등 8개 혐의로 기소했고, 한국 정부에 범죄인 인도 요청서를 보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 대표는 2015년 1월 9일 대전 자택 인근 경찰서에 용무를 보러갔다가 수배 대상인 사실이 드러나 즉각 구속·수감됐다.동종업계 기업인들과 대학 동문들이 나서 "첨단기술 기업인을 보호해달라"며 각계각층에 탄원서를 보냈지만 이 대표는 수감 3개월 만인 2015년 4월, 한국 정부에 의해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을 이유로 미국에 넘겨졌다.

사실 한국 정부가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이 대표의 범죄 혐의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았다면 미 검찰의 기소상의 오류가 걸러질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게 주변인들의 지적이다.

시카고로 송환된 이 대표는 한 달간 일리노이 주 캔커키 교도소에 수감됐다. 이어 가택 구금 상태에서 2년을 기다린 끝에 이달 초 재판이 시작돼 지난 15일 연방법원 배심원단으로부터 이메일 사기(wire fraud) 관련 5개, 밀수(smuggling) 관련 3개 등 총 8개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받았다.

이 대표는 각 혐의당 최대 징역 20년에 처해질 수 있다.

8개 혐의에 대해서도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이 대표 측은 미 검찰이 재판 도중 기소장에 기록된 핵심 혐의를 변경한 데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애초 이 대표가 자신의 제품을 미국산으로 속이고 미국 지방자치단체가 연방 정부로부터 받은 경기부양 기금을 사취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대표의 변론를 맡은 시카고 법률사무소 '인시드 로'(Inseed Law) 소속 라이언 김 변호사는 "검찰이 배심원 심리 막판에 기소장에서 '피고인 이헌석이 미 연방 경기부양 기금 133만7천189달러를 사취하려 했다'는 내용을 삭제하고, '이 대표가 미국 지자체와 직접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다"며 "이번 사건의 키워드는 '경기부양기금 사취'이고, 이 대표가 누구하고 계약을 맺었는지가 관건인데 이를 변경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담당 검사가 관련 규정을 확인하지 않은 채 기소를 했고, 재판 과정에서 오류가 드러나자 핵심 혐의 내용을 기소장에서 삭제한 것"이라며 "기소 변경은 한미 범죄인 인도 조약 위반일 뿐 아니라 기소 여부를 배심원 표결로 결정하는 미국 형사법 상으로도 위법이다. 재판권 흠결(Lack of Jurisdiction)에 따른 소송 각하 사유가 된다"고 말했다.

다시말해 미국의 경기부양법상의 경기부양 기금 사기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면 이 대표는 미국에 송환돼 범죄인 취급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나머지 혐의는 대부분 이 대표가 미국에 송환돼 조사받는 과정에서 추가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미 검찰은 이 대표의 제품에 붙은 '미국 내 조립' 표기가 2009년 발효된 미 경기부양법 '미국산 우선구매'(Buy American) 규정위반이라며 유죄 입증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해당 부처인 미국 환경청 지침서에 보면 경기부양법상 '미국산' 기준은 '실질적 변형'(Substantial Transformation), 즉 미국에서 일정량 작업을 준수했느냐 하는 문제"라며 "한국터보기계가 납품한 송풍기는 냉장고나 세탁기처럼 한 대씩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하수처리장에 3~4개씩 조립·설치되고 프로그래밍과 테스트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이번 재판은 담당 검사가 관련 규정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시작된 오류"라며 "정말 억울한 경우인데, 미국 검찰이 스스로의 오류를 덮기 위해 배심원단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유죄를 밀어부치고 있고, 판사도 오류 사실을 알면서 미국 정부 편을 들고 있다"고 반발했다.

그는 또 "검찰이 중견 수출기업인 이 대표를 이메일 사기, 밀수 등의 혐의로 몰고 있다"며 "유죄 판결에 필요한 '의심의 여지 없는 충분한 증거'(Beyond Reasonable Doubt) 조건도 결여됐다"고 논박했다. 이 대표 변론은 애초 미국 법원이 선임한 변호인이 맡았다가 작년 10월 김 변호사가 맡았다.

이 대표는 "미국 검찰이 한국터보기계를 표적 삼아 악의적인 기소를 했고, 나는 '억지 기소'의 피해자"라고 호소했다.

부인 박진명 씨는 한국터보기계가 300명의 주주와 13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정부 지분이 30%에 이르는 유망 기업이었던 점을 강조하면서 "납기일을 지키기 위해 1t이 넘는 물건을 비행기에 실어 보내는 등 최선을 다했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다.

박씨는 "대한민국 정부가 범죄인 인도 조약 위반 사실을 미국 법원에 상기시켜주고, 이를 통해 법원이 무혐의 판결을 내리길 소망한다"면서 "2년째 아빠 없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네 아이들과 함께, 남편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chicagor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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