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걸' '팜파탈'에 담긴 성차별적 고정관념은
신간 '그런 여자는 없다' '전진하는 페미니즘'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윔블던에서 6년 연속 우승한 '테니스 여왕'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최정상에 있을 때도 광고를 거의 찍지 못했다. 외모가 남성적인데다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에 딱 달라붙는 동료들 옷차림에 "왜 여자 선수는 끊임없이 여성임을 증명해야 하는가"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말괄량이' 여자아이는 어릴 때 귀여움을 받는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가 되면 숙녀로 변신해 여성성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성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다. 안나 쿠르니코바는 WTA(여자프로테니스) 투어 단식 우승기록이 없지만 잡지 표지에 반나체로 등장하며 돈을 벌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행동주의 그룹 '게릴라걸스'가 쓴 '그런 여자는 없다'(후마니타스)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말들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고정관념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성을 따라다닌다. 분홍색에 하트·꽃·주름 장식이 달린 틀에 박힌 옷을 입고 성장한다. 하지만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4∼5세 이하 아이들은 성별과 관계없이 똑같은 옷을 입었다.
'마마보이'는 남성성을 거세당한 존재지만 아빠의 사랑을 받는 파파걸은 순수한 이미지를 얻는다. 호시탐탐 남자를 유혹해 파멸에 이르게 하는 '팜파탈'(femme fatale)은 남자들 상상력의 산물이자 일종의 책임 회피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성욕으로 인해 자신에게 생긴 문제를 떠넘기기 위해서 만든 허상이라는 것이다.
영어의 온갖 욕설에 등장하는 '잡년'(bitch)이라는 단어는 중세 영어에서 암캐를 뜻했다. 17세기부터는 '뻔뻔하고 무례하며 이기적이고 음탕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잡년'의 의미는 20세기 이후 페미니즘과 맞물려 또다시 변화하는 중이다. 마돈나와 나오미 캠벨 등 자신을 '잡년'으로 부르는 거침없는 여성이 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잡년'임을 자처한다면, 그 말은 비하의 의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국의 잡년들이여, 단결하라. (…)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잡년이라 부른다면 가만 두지 말라!" 우효경 옮김. 356쪽. 1만6천원.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전진하는 페미니즘'(돌베개)은 이렇게 견고한 고정관념을 상대로 한 투쟁의 역사를 좌파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1985년부터 2010년까지 25년에 걸쳐 쓴 논문들을 통해 페미니즘이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일별한다.
저자는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50여 년 동안 이어지는 '제2물결' 페미니즘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1960년대 후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에 뿌리내린 남성중심주의를 폭로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 했다. 분배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논쟁의 범위를 가사노동과 재생산 문제로 확장한 시기였다.
사회민주주의와 전략적 연대를 맺었던 페미니즘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경제적 평등보다는 문화적 가치나 지위의 위계질서를 겨냥하는 '인정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사회투쟁은 문화투쟁에, 분배의 정치는 인정의 정치에 종속되어 버렸다. 애초의 의도는 분명 이것이 아니었다"며 아쉬워한다.
저자는 2008년 전세계에 걸친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가 흔들리면서 반세기 전 페미니즘의 급진적 구상이 부활할 수 있다고 본다. 과거 페미니즘이 '경제적 분배'와 '문화적 인정'이라는 성과를 얻었다면 이제 둘을 연결시킬 '정치적 대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문화·정치의 삼각 프레임으로 분배와 인정 사이의 허구적 이분법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임옥희 옮김. 350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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