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 병풍그림 들여다보니…다산이 유배시절 쓴 미공개 詩 발견
정민 한양대 교수, 계간지 '문헌과 해석'에 논문 발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병풍 그림인 '표피장막책가도'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 유배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가 발견됐다.
화가가 다산의 시첩을 보고 그려넣은 것으로, 시첩에 적힌 시 세 수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계간지 '문헌과 해석' 봄호에 표피장막책가도 속의 시첩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한다고 19일 밝혔다.
이른바 '호피장막도'로도 불리는 표피장막책가도는 가로 355㎝, 세로 128㎝ 크기의 8폭 병풍이다. 그중 여섯 폭에는 표범가죽 장막만 그려져 있고, 두 폭에는 표피 장막 아래에 책상과 각종 기물이 묘사됐다.
정 교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첩에 주목했다. 이 서첩에는 '산정에서 대작하며 진정국사의 시에 차운(次韻, 남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하다'(山亭對酌次韻眞靜國師)라는 제목의 시 한 수와 '산정에서 꽃을 보다가 또 진정국사의 시운에 차운하다'(山亭對花又次眞靜韻)라는 제목 아래에 딸린 시 두 수가 적혀 있다. 다만 마지막 시는 5행 중 2행만 있다.
글자체는 첫 번째 시는 반듯한 정자체인 해서, 두 번째 시는 약간 흘려 쓴 행서, 마지막 시는 흘림체인 초서로 각기 다르다. 또 첫 번째 시에는 '자하산인'(紫霞山人), 두 번째 시에는 차에 미친 사내라는 뜻의 '다창'(茶창<사람인변에 倉>)이라는 작자명이 남아 있다.
시첩에 실린 시들은 "흔들흔들 나무 집은 원래 속세 벗어났고/ 둥실둥실 뗏목 정자 내 몸을 부칠 만해/ 모두들 남방은 살기 좋다 말하더니/ 술 익고 생선 살져 또 서로를 부르누나"(搖搖樹屋元超俗/泛泛<사(木+差)>亭可寄吾/總道南方生理好/魚肥酒熟又相呼)라는 구절처럼 편안한 생활을 주제로 삼았다.
정 교수는 "그림 속의 필체는 다산의 친필과 매우 유사하다"면서 "화가가 실물을 놓고 그대로 베낀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역량 또한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같은 진정국사의 시를 차운했고, 제목 상에 또 우(又) 자를 쓴 것으로 볼 때 자하산인과 다창은 한 사람의 별호"라며 "차를 좋아하고 남방에 산 경험이 있으며 자하산인이란 별호를 지닐 만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하산은 다산초당이 있던 귤동 뒷산의 다른 이름으로, 정약용은 실제로 자하산인이라는 별호를 사용했다"며 "1년에 수백 근의 차를 만들어 마시던 다산이 다창이라는 별호를 썼다는 사실도 이 서첩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시 속에 등장하는 '진정국사'(眞靜國師)는 누구일까.
정 교수는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 머물렀던 승려인 진정국사 천책(1206∼1294)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산이 지금은 전하지 않는 천책의 문집인 '호산록'(湖山錄)을 즐겨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다산은 1805년 백련사 주지로 온 아암 혜장과 가깝게 지내면서 천책을 알게 됐고, 천책의 만년 거처인 용혈암터로 소풍을 떠나곤 했다.
이어 정 교수는 시첩의 제목에 나오는 '산정'(山亭)은 강진 대구면 항동 인근에 있던 윤서유의 별장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다산 문집과 윤서유의 묘지명에는 두 사람이 술과 생선 안주를 맛보며 즐겁게 노닐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 교수는 "그림 속에서 다산의 시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서첩의 두께로 보아 많게는 20수 남짓한 시가 수록됐을 것"이라며 "화가가 그림 속에 그리고 싶었을 정도의 장정과 글씨였다면 상급의 다산 시첩이었을 텐데 행방을 알 수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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