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말레이 국민 억류, 이제 북한의 실체다
(서울=연합뉴스) 김정남 피살 사건 이후 악화일로를 걸어온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급기야 상대국민을 인질로 잡고 단교를 향해 치닫고 있다. 먼저 일을 벌인 쪽은 이번에도 북한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7일 "외무성 의례국이 해당 기관 요청에 따라 (중략) 조선 내 말레이시아 공민들의 출국을 임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을 말레이시아 대사관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북한에 체류 중인 말레이시아인 11명을 사실상 억류하겠다는 뜻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의 김정남 피살 사건 수사 결과에 불만을 품은 북한이 인질을 잡고 말레이시아 측을 겁박하는 극단적 수단을 동원한 것 같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 내 북한대사관 직원들과 관계자들의 출국을 금지하는 것으로 즉각 맞받았다. 현재 말레시아에는 북한대사관 직원 28명과 북한 주민 1천여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혹을 떼려다가 몇 개 더 붙이는 꼴이 될 것 같다.
양국 간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김정남 피살 사건이 터지고부터다. 말레이 당국이 수사에 착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은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북한 대사관 직원이, 미리 잠입해 있던 북한 공작원들과 함께 외국인 여성 두 명을 포섭해 저지른 범행이었다. 게다가 여행객들이 북적이는 한 나라 수도의 국제공항에서 'VX'라는 치명적 독가스를 사용한 범행 수법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북한의 무모하고 잔인한 범행에 당사국인 말레이 당국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북한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범행을 전면 부인했다. 심지어 김정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북한 여권을 소지한 김철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정남의 시신 부검 결과도 한국과 말레이 정부가 공모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자국 내에서 발생한 중대 범죄에 대해 수사권을 행사하는 말레이 당국에 대고 김정남의 시신 인도를 뻔뻔스럽게 요구하기도 했다. 국제적 외교관례는 고사하고 보통 사람의 상식에도 전혀 맞지 않는 북한의 이런 생떼는 이제 국제사회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다. 북한은 2009년에도 자기들 체제를 비판했다며 현대아산 근로자를 136일 간 개성공단에 억류했다. 한마디로 못할 일이 없는 북한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북한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김정남 살해 이전에 미리 짜 놓은 모종의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말레이시아는 북한에 상당히 중요한 나라다. 김정남 피살사건 이후 말레이 당국에 의해 파기됐지만 원래 양국 간에는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돼 있었다. 그 덕에 북한은 말레이를 동남아 외교와 외화벌이의 전진기지로 이용해 왔다. 실제로 말레이에 거주하거나 체류 중인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외화벌이 일꾼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북한은 이번에 말레이를 잘못 건드려 단교를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됐다. 말레이 정부는 현재 북한대사관 정문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사실상 대사관을 봉쇄한 것이다. 오는 10일에는 내각회의를 소집해 북한과의 단교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유엔의 고강도 제재 아래 외화난이 심각한 북한으로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벼랑끝' 버티기에 능한 북한의 과거 행태에 비춰 말레이 정부와 원만한 타결책을 도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외교가에선 결국 단교로 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국제 외교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북한의 이번 억류 폭거는 김정남 피살사건의 꼬리를 문 만행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착화 징후가 뚜렷한 북한의 국제적 고립이 사상 최악의 단계까지 심화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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