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가 선물한 둥지…다섯 화가에 '날개'를 달아주다
사업가 정주형씨, 2년간 창작공간 후원…작업 결산하는 그룹전 열려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석고상을 그리면 어딘지 모르게 자기 얼굴이 묻어나오는 것 같아." "맞아요. 저는 아그리파를 그릴 때 그렇더라고요." "아그리파라니, (못생긴) 카라칼라가 아니고? 으하하."
지난 3일 서울 대치동의 한 갤러리에 마주앉은 다섯 남녀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 친구처럼 보이는 이들은 정주형(44) 이모션 전 대표와 신창용(40), 조문기(40), 이현진(38), 정지선(35) 작가다. 3년 전만 해도 벤처 사업가와 예술가로 살면서 삶의 반경이 겹칠 리 없었던 이들은 후원자와 작가로 인연을 맺었다.
1995년 웹에이전시 업체인 이모션을 창업한 정 전 대표는 2014년 지인의 집에 걸린 미술품을 눈여겨본 것을 계기로 작가들에게도 관심을 두게 됐다. 한때 작가 4천여 명이 속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했던 김남희 아트웨이브 대표를 마침 알게 되면서 젊은 사업가가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아이디어가 구체화했다. 김 대표는 "작가들도 인정할 정도로 뛰어나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만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다섯 작가를 추천했다. 2015년 봄 홍대 인근의 건물 한 층이 이들을 위한 창작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젊은 사업가 10명 중 9명은 어느 정도 돈을 벌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다들 돈 버는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우면서 쓰는 법은 정작 생각해보지 않아서 한 달에 얼마씩 내는 기부로만 쏠리는 거죠." (정 전 대표)
다양한 지원방안 중에서 왜 작업실을 선택했을까. 작가들이 앞다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지선 작가는 대학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다. 이전에 사용했던 미아동 작업실은 주차장을 개조한 공간이라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20만 원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했지만, 더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난방도 거의 틀지 않았다. 지인들 사무실 한편을 작업실로 빌려 쓰는 생활을 10년 넘게 한 조문기 작가는 "홍대에서 이태원으로, 다시 이수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면서 "계약 기간도 차기 전 나가라고 할 때도 많았지만 세입자의 세입자인 셈이라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일부 미술관이나 갤러리, 정부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있지만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다. 대다수가 작품 활동만으로는 생계유지뿐 아니라 100만 원 이상 드는 작업실 임대료와 재료비 등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별도의 일을 해야 한다. 일을 병행하다 보면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쉽지 않고, 결국 작품에 진전이 없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10년 전 유학에서 돌아왔을 당시만 해도 또래 작가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연락이 닿거나 작업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한 이현진 작가는 "이쪽 세계가 나름대로 '하드코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야기를 경청하던 정 전 대표는 "극소수 블루칩 작가 위주의 미술 시장만 존재하고, 벤처의 스타트업 같은 신진 작가가 탄생할 수 없는 구조"라면서 "공간만 지원해도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선순환이 될 것으로 봤다"고 강조했다.
"난민 같은 생활"을 끝내고 '아트웨이브'라는 이름의 둥지에 입주한 다섯 작가는 지난 2년간 작업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그 결과물이 지난 4일 슈페리어갤러리에서 시작한 그룹전 '룸스 포 아트'(Rooms for art)다.
게임과 영화, 음악 등을 창작의 소재로 삼는 신창용 작가는 "아르바이트를 안 해도 되니 그림을 기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고 지난 10년의 작품 세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현진 작가는 "창작의 샘물이 너무 소진됐다고 생각할 무렵 이곳에 오면서 한 단계 올라설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밖에 반복되는 삶의 허무함을 연필과 잉크 등으로 표현하는 정지선 작가, 버려진 물건들과 포장지를 통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김정선 작가,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표현하는 조문기 작가의 작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정 전 대표는 임대료와 공과금 등을 합해 2년간 약 5천만 원이 들었다고 밝혔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모델이 확산하길 바란다는 정 전 대표는 "작품만 잘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팬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고 그런 팬들을 만들기 위해 마련한 것이 이번 전시"라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다섯 작가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또 새로운 작가들을 돕겠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전시는 3월 15일까지. 문의는 ☎ 02-2192-3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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